작품 탄생 30주년 에디션, 국내 개봉 25주년 기념, 메가박스
2025년은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가 제작된 지 30주년(개봉 25주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나에게 러브레터는 우리나라로 치면 '살인의 추억', 미국으로 치면 '쇼생크 탈출'과 같은 눈에 띄기만 하면 정주행하는 그런 영화로 이미 다양한 경로로 봐왔던 작품이긴 하지만 단 한 번도 극장에서 본 적은 없었는데 이번 재개봉은 러브레터를 처음으로 극장에서 관람하게 된 기회가 되었다.
아무래도 처음 접했던 시기의 감상이 가장 인상 깊을 수밖에 없는데(비디오, 비디오 CD로 접했던...) 그때와 지금의 나는 또 많이 다르기 때문에 지금 극장에서 러브레터를 본다면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가 굉장히 궁금하기도 하고 하던 차 두서없는 글을 작성해 본다.
- 영화는 눈발이 거센 하얀 설원에 죽은 듯이 숨을 참고 있는 히로코(나카야마 미호)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산에서 조난당한 약혼자 후지이 이츠키의 마지막을 상상하며 누워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참았던 숨을 토해내고 일어나 눈을 털고 3주년 추도식을 향해 걸어간다.
- 히로코는 두통을 호소하는 이츠키의 어머니(카가 마리코)를 차로 데려다주게 된다. 우선은 꾀병이지만 아픈 부인을 차 안으로 거칠게 밀어 넣는 남편의 행동에 꽤 놀랐다.
- 20대 중후반의 히로코는 해치백 차량의 오너다. 경차의 나라 일본에서 이 정도 차급(준중형급?)을 이 나이에 몰고 있는 걸 보면 부유한 집안의 딸이지 않을까? 웃긴 건 안전벨트를 하고 있지 않더라...ㅎㅎㅎ 법으로 강제하던 시기가 아니었던 거 같다.
- 후지이 이츠키의 집에 방문한 히로코는 이츠키가 사용했던 방을 둘러보는데 이츠키는 그림을 잘 그렸던 거 같다. 등산을 했던 사람답게 산을 그린 그림이 방 곳곳에 있고 산 사진들도 붙어 있다. 예전이라면 발견하지 못했을 요소들이다.
- 이츠키의 방에서 중학교 졸업앨범을 보게 되는데 84년도 앨범이다. 일본 중학교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대충 계산해 보면 영화상 이츠키와 히로코 등의 나이는 26~27살 정도로 계산된다.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50대 중반? 주연인 나카야마 미호가 1970년생이니 얼추 맞는 나이다. 나카야마 미호는 작년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극중 히로코가 이츠키를 추억하고 떠나보낸 것처럼 이번 30주년은 관객들이 나카야마 미호의 추억을 소환하고 떠나보내는 그런 기분이지 않을까?
- 히로코가 오타루의 여자 이츠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여자 이츠키가 처음 등장하는데 이츠키는 감기에 걸려 마스크를 쓰고 있다. 몇 년 전 코로나가 터지고 당시 일본 아베 총리가 마스크 쓰고 있는 모습이 논란이 된 적 있는데 그 이상한 모양의 마스크를 여자 이츠키가 착용하고 있었다. 일본은 코로나 이전부터 저런 형태의 마스크를 사용했구나 싶었음.
- 히로코와 이츠키의 선배인 아키바(토요카와 에츠시)는 유리공예를 하는 장면으로 등장을 하는데 사투리가 있는 일본어(간사이벤, 오사카 사투리)를 한다. 이번 30주년이 1999년 국내 개봉 당시의 세로 자막을 복원하고, 의역과 오역을 바로잡아 원작에 가깝게 개선했다고 하는데 나는 솔직히 세로 자막이 불편했고 약간의 일본어는 알아듣기 때문에 자막은 곁눈질로 보고 일본말의 뉘앙스? 같은 걸 이해했는데 아키바는 오사카 사투리가 심하고 말도 빨라서 화면도, 자막도 동시에 놓치는 느낌을 받았다.
- 예전에는 아키바라는 캐릭터가 멋있게 보이라고 유리공예를 하는 설정이라 생각했는데 남자 이츠키가 그림을 그렸다고 생각해 보면 남자 이츠키는 예술대학에 진학한듯싶다. 아키바는 유리공예, 남자 이츠키는 미술을 했고 같은 산악 동호회라는 느낌.
- 이후 편지를 주고받으며 나카야마 미호의 히로코 & 여자 후지이 이츠키 1인 2역 연기를 감상할 수 있는데 차분한 단발의 히로코와 부스스한 단발의 이츠키가 그대로 캐릭터 성격에도 녹아있어 같은 단발이고 같은 배우이지만 연기의 온도차가 분명하다.
- 여자 이츠키가 모교 선생님을 만났을 때 선생님의 출석번호 기억력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데 일본의 졸업앨범 주소록이 출석번호 순서라고 한다면 남자 이츠키의 사라진 주소가 먼저 나와야 한다. 하지만 남자 이츠키는 졸업전에 이사를 가서 사진만 따로 실리고 당시 옛 주소는 누락되었거나(국도 터널 예정지라서) 전학자로 아예 순서가 뒤편으로 빠졌을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봤을 때는 히로코가 우연히 여자 이츠키의 주소를 먼저 발견하고 그 주소로 보낸 줄 알았는데 히로코가 검지 손가락으로 세세히 순서대로 이름을 찾는 장면을 보니 그 순서가 출석번호이든 가나다순이든(가나다순이면 2개의 후지이 이츠키 주소를 연달아 발견했을거다) 잘못 보낼 수가 없는 느낌적인 느낌임.
- 히로코와 있는 아키바는 틈만 나면 담배를 꺼내어 물려고 하고, 여자 이츠키의 도서관 사서 친구(오사다 에미코) 역시 흡연자로 어떤 장면에선 이츠키가 재떨이도 들어주고 있다. 히로코도 여자 이츠키도 주변의 흡연자들로 인해 간접흡연을 하는 환경인데 예나 지금이나 비흡연자들은 그 처지가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거 같다.
- 여자 이츠키는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증거로 주민증? 사본을 보내는데 개인정보의 관리, 유출 개념이 지금 같지 않았으니 가능한 설정인 듯...
- 여자 이츠키는 고모부와 새 집을 구경 가던 중 강제로 병원을 가게 되는데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는 와중 폐렴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그 기억을 기점으로 남자 이츠키의 만남까지 빠르게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지만 간호사의 부름에 깨어난다.
- 남자 이츠키(카시와바라 타카시)를 짝사랑하는 사나에(스즈키 란란)를 여자 이츠키가 남자 이츠키에게 소개해 주는 장면이 있는데 차인듯한 사나에가 나오고 남자 이츠키는 '엑소시스트'라는 책을 반납하고 도서관을 나가버린다. 왜 엑소시스트인가 궁금해서 찾아보니 해당 배우인 스즈키 란란은 이와이 슌지의 '고스트 스프'라는 작품에 출연했었다. 아마도 연관이 있는 듯...? 책을 반납하는 컷이 짧기도 하고 책 제목에 대한 자막도 없었던 거 같은데 이번 재개봉에 추가된 걸지도 모르겠다.
- 남자 이츠키는 그것도 부족했는지 자전거를 타고 있는 여자 이츠키의 얼굴에 종이봉투를 씌워 암살시도...ㅎㅎㅎ
- 중학생 여자 후지이 이츠키 역할에는 사카이 미키가 연기했다. 모든 장면에서 다양한 양갈래 머리를 하고 나오는데 그중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아스카' 헤어스타일이 가장 좋았다. 이츠키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에서는 편안한 로우 포니테일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그러다 다시 등교할 때 양갈래 머리모양을 하는 걸 보면 학교나 외출 시에만 하는 헤어스타일일지도 모른다.
- 여자 중학생 후지이 이츠키 역할은 나카야마 미호의 친동생인 '나카야마 시노부'가 맡았어도 제법 어울렸을지 모르겠다. 나카야마 미호에 비해 부드러운 인상이고 나이차가 적다 보니 살짝 무리인 건 알겠는데 '이연걸의 정무문'을 생각해 본다면 아쉬운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네...
- 남자 이츠키는 중학교 시절 육상대회 100m 선수로 뽑혔다. 교통사고로 왼쪽 다리를 다치긴 했지만 100m 학교 대표로 뽑힐 정도면 운동에도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후로 등산, 등반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 운동을 잘하는 설정인가 보다. 영화 보는 내내 남자 이츠키는 영어 시험을 못 봤을 뿐이지 집도 부유하고 운동과 예술적인 감각도 있는 설정이다. 무뚝뚝한 성격이라고는 하지만 처음 본 히로코에게 바로 고백을 했을 정도니 실전에도 강했다.
- 현재의 여자 이츠키가 고열로 쓰러지고 히로코 역시 불아범 산장에서 남자 이츠키가 조난 당한 산을 바라보며 외치는 씬들은 예전이었으면 꽤 감정적인 기분이 올라왔을 텐데 이번에는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걷지 않고 뛰겠다는 할아버지와 그 유명한 '오겡끼데스까'가 나오는 클라이맥스 장면인데 나이가 들고 여러 번 보게 되니 처음의 그 감정을 다시 느끼긴 힘들었다.
-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얼음 속 잠자리를 바라보며 여자 이츠키는 그제야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얼음 속 잠자리가 뭘 말하고자 하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 새 학기가 시작되지만 여자 이츠키는 몸져누운 엄마를 돌보기 위해 등교를 하지 못하고 집안일을 돕고 있다. 이때 남자 이츠키가 집으로 갑작스러운 방문을 한다. 지금 보니 서로 각자의 사정을 전혀 몰랐던 상태의 만남이다. 당장 이사를 가야 할 그 순간에 잠시 시간을 내어 여자 이츠키 집을 방문했지만 학교에 있었어야 할 여자 이츠키 모습에 당황했고, 집 문에 붙은 종이를 보고 삼가 조의를 전한다. 여자 이츠키는 남자 이츠키의 솔직한 모습을 이때 처음으로 보게 되었을 것이고 그런 모습에 밝은 미소를 짓는다.
- 학교로 등교한 여자 이츠키는 남자 이츠키의 전학 소식을 듣게 되고 전학 간 이츠키의 책상에 올려진 국화 병을 박살 내버린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과 또 다른 이츠키의 전학을 죽음이라는 장치로 장난치는 모습에 제대로 폭발하는 장면. 하지만 짓궂게도 시간이 흘러 다시 남자 이츠키의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에는 그 꽃병의 의미대로 죽음이라는 장치가 작동되어버린다.
- 중학생이던 여자 이츠키의 성격은 꽃병을 박살 내버린 이후로 좀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현재의 여자 이츠키의 성격이 이때부터 발현된 것이 아닐까? 사실 중학교 시절과 현재의 이츠키는 묘하게 성격이 다르다. 중학교 시절에는 숨기고 있던 내면의 성격이었다면 성인의 이츠키는 그것이 표면으로 드러낸 상태로 보였다. 죽어버린 남자 이츠키는 몰랐을 모습이고 그의 연인인 히로코는 중학생 여자 이츠키의 성격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도서 카드 뒷장은 책의 제목 그대로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 이츠키가 이츠키를 향한 뒤늦은 고백을, 그리고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알게 되는... 이 영화의 유일한 러브레터다.
- 푸른산호초의 의미는 무엇일까? 남쪽 바람을 타고 사랑을 보낸다고 하니 히로코에 대한 사랑고백이었다고 봐야 할까? 오타루의 이츠키에게는 아무래도 차가운 북풍의 남하로 그 바람이 닿지 않을 거 같은 기분이 든다. 푸른 산호초를 부른 마츠다 세이코의 시그니처 단발인 세이코컷을 생각해 본다면 역시 히로코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여자 이츠키의 쇼컷을 남자 이츠키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테니 말이지... 하지만 아무래도 첫사랑을 연상시키는 가사이기도 하고, 좋아한다고 내색한 적이 없는 노래를 죽음 직전에 불렀다는 것은 여자 이츠키를 떠올렸을법한 여지도 충분해 보인다.
- 그나저나 극중 히로코가 이 노래를 몰랐다는 것이 왠지 개그 포인트로 느껴진다. 나카야마 미호 역시 아이돌 출신의 배우이고 마츠다 세이코나 나카모리 아키나 다음 세대의 아이돌이니 절대 모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뉴진스 하니가 커버한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려지는데, 지금 버니즈 세대들이 이 영화를 본다면 가장 흥미로운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 보는 내내 필름으로 촬영된 작품이다 보니 필름의 질감이 느껴져서 좋았고, 거기에 디퓨저나 미스트 필터 같은 부드러운 느낌과 간혹 보이는 렌즈의 색수차들이 매우 정겹게 느껴졌다. 컷편집은 초반에 템포도 안 맞고 너무 짧게 자르는 구간들이 약간씩 보이긴 했지만 후반부의 몇몇 교차편집을 보면 당시 필름으로의 작업을 고려했을 때 얼마나 손이 많이 간 작품인지 느껴지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