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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작가 Jun 10. 2018

내가 네 엄마란다

엄마를 못 알아보는 내 아들과 친해질 수 있을까



공항까지 가서 비행기를 놓쳤다.

크리스마스 연휴가 시작되는 12월 23일 아침이었다.


내 비행기 곧 떠난다고 소리를 지르고 새치기까지 해가며 게이트까지 뛰어갔는데 이미 닫혔다. 비행기 꼭 타야 한다며 사정해도 소용없었다. 항공사 직원은 나 같은 사람을 많이 봤다는 듯 사무적으로 대꾸했다.

"원래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비행기 놓쳐서 못 타는 사람들 많아. 그런 사람 모두를 위해 비행기가 기다려 줄 수는 없어.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수화물 찾도록 해."

우리나라로 치면 민족 대이동이 이루어지는 명절 기간에 공항에 간 셈이었다. 평소에는 30~40분이면 짐 부치고 보안검색도 끝나는 공항이라 출발 두 시간 전까지 가도 여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공항에 도착해서 놀랐다. 유럽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 걸 본 적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다들 스키며 보드며 엄청난 레저 장비들을 챙기고 떠난다. 수화물 부치는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24일에 도착해 성탄절에 아기 유아 세례식에 참석하겠다던 계획이 완전히 물거품이 됐다. 설상가상으로 내 스튜디오 원룸은 한 달간 다른 사람에게 재임대를 해주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빈집으로 두기에는 한 달 월세가 너무 비싸서) 모든 짐을 정리해 친구들 집에 분산시켜 맡겨놓은 상태였다. 게다가 그 친구들도 연휴를 즐기러 이미 제네바를 떠났다. 완전히 멘붕에 빠진 채 주인이 없어 비행기에서 다시 내려진 불쌍한 나의 수화물들을 찾고 추가 수수료를 내고 비행기 티켓을 바꿨다. 내 평생 이렇게 우울한 크리스마스는 처음이었다. 가족도 없고, 친구들도 휴가를 즐기러 떠나고. 나는 제네바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 똑같이 텅 비어버린 방에 홀로 남겨진 채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마트에 한국라면조차 없었다면 더 슬펐겠지



외롭고 우울한 크리스마스의 대명사 브리짓 존스 (구글 이미지 검색)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 도착했다. 나름 장거리 비행에 요령이 생겼는지, 이북리더기에 다운받아간 몰입도 높은 소설 두 편을 읽고 영화 한 편을 보고 나니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짐을 풀고, 목욕재계를 하고, 시댁에 있는 아기를 보러 갔다.

"짠! 아가야~ 엄마 왔다!"


기억 저 깊숙한 곳에 새겨져 있을 엄마의 목소리와 냄새, 얼굴을 제발 기억해 내길...
그리고 네가 싱긋 웃어주면 그동안의 마음고생은 눈 녹듯 사라질 거야.


낮잠에서 부스스 일어난 아기는 내 얼굴을 보고 울었다. 반가워서가 아니라 낯선 사람이 얼굴을 들이대니 놀라서 울었다. 백일 간 내 손에 컸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기는 엄마인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며칠이 지나면 아니, 몇 주가 지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아기에게 일 순위는 할머니였다. 할머니를 엄마로 알고 있었다. 아니, 내가 뱃속에 열 달을 품고 있었고, 백일까지도 키웠는데 불과 세 달만에 이럴 수가! (그도 그럴 것이, 아기 입장에서는 반평생을 할머니와 보낸 셈이었다.)

할머니의 자리를 엄마가 대체할 수 있을까? 앞으로의 육아가 만만치 않으리란 걸 직감했다.




한국에 하려 했던 일, 만나고자 했던 사람들,

모든 계획을 뒤로한 채 친정으로 내려가 본격적으로 아기와 친해지기에 돌입했다.


1단계. 아기에겐 일단 맘마가 가장 중요하니 이유식 먹이기, 우유 먹이기부터 나섰다. 할머니가 먹이면 끝까지 즐겁게 먹던 아이가, 내가 먹이면 배고플 땐 잘 받아먹다 어느 정도 배가 차면 고개를 돌리고 거부했다. 할머니가 우유 먹일 땐 먹다가도 스르르 잠들던 아기가, 내가 먹일 땐 절대 자는 법이 없었다.


2단계. 같이 놀이하기. 아기는 하루에 두 번, 딩동댕 유치원의 뚜앙을 만났다. 나도 함께 보며 춤을 췄다. 인간 바운서가 되어 아기를 점프점프 하늘 높이 띄우고, 없는 연기력을 쥐어짜 동화책도 읽어줬다가, 붕붕카를 태워 집안을 활보하기도 했다 (아이고 허리야). 아기는 놀이친구로 엄마를 받아들였다.


3단계. 낮잠 재우기. 신생아 때부터 잠투정이 있던 아기는 안아주거나 업어줘야 잠들었다. 할머니는 주로 우유를 먹이다가 혹은 업어서 재웠다 (수면교육 따로 없음). 나도 포대기 사용법을 배워 업어봤다. 할머니가 업으면 10분 이내에 잠드는 아기가, 내가 업으면 자장가를 부르며 40분을 맴돌아도 잠들지 않았다. 그러다 졸려서 잠투정이 더 심해지기도... 그래도 가장 많이 발전한 부분이다. 한 달 정도 밀착마크를 하니 가끔 내 등에서 낮잠에 빠지는 경우도 있었다.


4단계. 밤잠 재우기. 이건 절대 불가. 범접할 수 없는 할머니만의 영역이었다. 한국에 머무르는 한 달 동안, 내가 밤잠을 재우기에 성공한 적은 없었다. 잘 때가 되면 아기는 울고 불고 할머니 품만 찾았다. 


나는 무늬만 엄마였다. 

단 하룻밤도 아기를 데리고 따로 잘 수 없는 반쪽짜리 엄마.





래도 다행이었다. 두 번째 학기에도 함께 할 수 없는 신랑을 대신해 친정엄마가 세 달간 스위스에 머물며 아기를 봐주시기로 결정하셨다. 그리고 친정아버지는 딸 때문에 난데없이 기러기 신세가 되어 버렸다. 


(출처: 국민일보, '혼자 사는 기러기 아빠들, 이대로 놔두면 큰일나겠네')


넉살 좋은 신랑은 우리 아빠에게 같은 기러기 처지끼리 한 달에 한 번씩 만나서 식사하며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자며 손을 내밀었고, 그렇게 사위와 장인은 더욱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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