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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작가 Sep 02. 2018

독박육아 한 달째: 시험을 망쳤다

이번 학기는 육아도 공부도 모두 실패다.



아기에게 또 화를 냈다. 이번엔 등짝을 찰싹 때리기까지 했다.


아기를 9시 반에 재우고 1시 반까지 기말 페이퍼를 썼는데 끝내질 못했다. 마감일은 벌써 이틀 지났다. 오늘 못 내면 또 하루가 지나가는데.. 낮에는 책상 앞에만 앉아도, 노트북만 켜도 매달리고 난리를 치는 통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마음이 조급해진다. 어김없이 아기는 새벽 6시에 일어나 엄마를 깨운다. 제발 7시까지만 자게 해주면 안 될까?


응가 기저귀를 갈 때마다 몸부림을 치고 도망 다니는 아기 때문에 (심지어 하루에 서너 번씩 응가하는데) 늘 욕실에서 씻기다가, 오늘은 내 몸이 너무 피곤하니 잘 타일러서 침대에서 갈자고 했던 게 화근이었다.

"엄마 응가 치우는 동안 가만히 있어줄 거지? 착한 우리 아가 잠깐만 기다려줘~"

살살 달래 가며 조심스레 기저귀를 열었다.


달랜다고 가만히 있을 아기가 아니었다. 잠시를 못 참고 온몸을 뒤틀고 도망친다. 그 틈에 응가가 침구에 묻었다. 안 그래도 잠이 부족해 예민한데 언제 씻기고, 언제 치우고, 언제 세탁까지 하나. 순간, 분노 게이지가 폭발, 뚜껑이 열렸다.

"야!!!! 움직이지마!!! (등짝 찰싹)"

"으앙~"



고작 12개월된 아기가 얼마나 큰 잘못을 했다고 그걸 못 참고 소리를 질렀을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금방 바닥을 드러낸 인내심이 실망스럽다. 매일매일 테스트당하고 있는 참을성의 한계, 그 깊이가 점점 얕아지고 있다.



독박 육아 한 달째, 더 이상은 못하겠다. 


무인도에 나와 아기 둘만 남아 있는 것 같다. 메아리조차 울리지 않는 동굴에 대고 혼자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 같다. 나 좀 도와달라고, 나 좀 살려달라고. 지금 내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해 줄 이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외롭고 괴롭다. 억울한 마음에 남편에게 원망의 말을 퍼붓는다.


당신은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자기계발하면서 회사만 다니면 되니까 참 좋겠다.
육아도 안 해도 되고 살림도 안 해도 되고.
난 지금 육아에 살림에 공부에 당신 보험 문제도 처리해야 하고
크레쉬 등록 서류 준비까지 혼자 다 하느라 죽겠는데.
반대로 당신이 유학가고 내가 한국에서 일하고 있어도 이랬을까?
분명 애는 내가 한국에서 일하면서 아등바등 키우고 있겠지!
애는 나 혼자 낳았냐고!



한참 퍼부어놓고 돌아서서 또 후회한다. 한번 내뱉은 말, 이미 엎질러졌다. 남편도 자기 자리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마음에서는 분노가 솟구친다. 하루에도 몇번씩 롤러코스터를 타는 감정을 애써 가라앉히며 자조한다. 어쩌겠어, 유학은 내 선택인걸. 내가 이따위 한국에서 태어난 여자고, 엄마이기 때문인 걸. 포기하고 도망가고 싶다. 근데 내가 사라지면 우리 아기는 어쩌지?








아기와 함께하는 유학생활은 어떤지 궁금해하는 지인들에게 이렇게 답하곤 한다.

공부는 스트레스가 있어도 그만큼 보람 있고 생산적인 일을 한다는 만족감이 크다. 아기와 하루 종일 지내며 세 끼 밥 챙겨 먹이고, 그 틈에 내 밥도 후루룩 마시는 것도 이제 적응되어할만하다. 아기의 꺄르르 웃는 소리도 기분 좋고, 내 품으로 파고드는 조그만 손과 발도 귀엽고, 내가 해주는 이유식을 제비처럼 입을 쫙쫙 벌려 받아먹을 때도 예쁘고 행복감을 느낀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둘을 동시에 해야 한다는 데서 버벅버벅 버퍼링이 시작되고, 결국은 둘 다 제대로 못하게 된다고. 유학도 육아도 처음이고, 이 둘을 동시에 하는 것도 당연히 처음인지라 아직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했다고.



언제쯤 나도 이런 모습으로 살 수 있을까... 육아도 유학도 포기할 수 없는데. (출처: http://communitywealth.com)



첫 학기, 영어 자신감이 바닥을 뚫고 나가 입도 벙긋하지 못하는 내게 유일하게 희망을 줬던 과목, 통계학.

인류학, 사회학, 국제법 등 다른 수업에 비해 간단한 영어만 이해할 수 있으면 되고, 교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걸 꾸준히 복습하고 연습문제를 여러 번 풀어보면 시험 보는 건 문제없었다. 게다가 나는 수능 볼 때까지 미적분과 각종 함수를 자유자재로(?) 다루던 이공계 출신이 아닌가. 그리하여 이번 학기엔 야심 차게 Advanced Quantitative Methods, 즉 계량경제학 입문 수업을 수강했다. 무엇보다 이건 잘 해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경제학 배경지식이 없어 좀 어렵긴 해도 따라갈 만했다. 중간시험 결과는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친정엄마가 귀국하시고 독박육아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기말시험을 앞두고, 욕심이 컸던 만큼 속상함도 커서 눈물이 났다. 할머니, 아빠를 한국으로 떠나보내고 충격에 아프고 나서는 잠시도 엄마 곁을 떠나지 않으려고 울고불고하는 아기 때문에 수업을 한 번 결석했고, 월요일 아침 8시부터 우리 집에 와서 아기를 봐줄 베이비시터를 구하지 못해 TA(조교)의 보충수업을 세 번 못 갔다. 그래도 교재 리딩하고, 수업 자료와 조교의 노트를 복습하고, 연습문제 풀어보고 잘 모르는 건 교수님이나 TA의 오피스아워에 찾아가 질문하면 될 일이었다. 내게 공부할 시간만 있다면.

 

모든 것의 전제가 되는 '시간', 하필 내겐 그게 없었다.



억울했다. 

노느라, 딴짓하느라 공부를 안 한게 아니었다. 그저 내게 주어진 육아와 학업 사이의 줄을 아슬아슬하게 타고 있었을 뿐. 

잘못이라면 더 젊을 때 공부하지 않고 뒤늦게 시작했다는 죄, 아기를 낳아놓고 하고 싶은 걸 포기하지 않았다는 죄뿐인데 결과는 참담하고 가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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