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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로 Sep 27. 2023

익숙하고도 낯선

Day 2


예진이 내어준 방은 이른 아침이면 창으로 해가 눈부시게 들어왔다. 몽골은 여름이면 오전 여섯 시 전에 해가 떴다. 여섯 시쯤 분명 눈을 뜬 것 같았는데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오른쪽 눈만 반쯤 뜨고 침대 밑을 봤다. 전날 벗어둔 옷가지와 물기를 말리려 널어둔 세면도구 따위가 풀다만 짐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정리정돈에 집착하는 편이라 이미 봐버린 짐을 정리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피곤이 가시지 않은 몸을 일으켜 책상과 서랍, 옷장 안을 물티슈로 닦아냈다. 캐리어에 싸 온 것들을 정리했다.


5월 중순에서 6월 중순까지는 패딩을 입을 만큼 추운 날씨부터 반팔을 입어도 더운 날씨가 오가는 시기라 사계절 옷을 골고루 챙겨 왔다. 그 덕에 옷장에는 고이 접어 정리한 반팔부터 옷걸이에 건 누빔재킷, 바람막이 등이 한데 뒤섞였다. 반년도 거뜬히 버틸 것 같았다. 멍한 정신으로 느릿느릿 정리하다 보니 바닥을 쓴 빗자루를 정리할 땐 거의 한 시간이 지나있었다.



방은 퀸사이즈 침대와 가로로 넓은 옷장이 들어가고도 공간이 충분히 남을 만큼 컸다. 요가 매트를 깔고 운동을 해도 부담이 없을 정도였다. 그에 비해 책상은 침대 머리판과 창문 옆 벽 사이 공간을 어떻게든 활용하려고 만든 것처럼 자그마했다. 튀어나온 기둥에 맞게 반의 반 정도가 잘려있어 실질적인 활용 공간은 한 사람이 앉으면 몸 크기와 비슷한 정도였지만 매일 밤 일기를 쓰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이 작고 소중한 책상에서 몽골 이야기를 써내려 갈 것이다.




집에 있는 라면으로 점심을 대충 때우고는 집을 나섰다. 밖에 나갔다가 장을 봐올 생각이었다.



울란바토르의 중심부엔 러시아 대사관과 수흐바타르 광장이 있다. 중심부에 집이 있어 울란바토르 어디든 걸어갈 수 있었다. 거리에는 현대식 유리 건물, 색색의 페인트칠과 철제 창살이 있는 유럽 풍의 건물, 아시아의 정취가 느껴지는 사원을 모두 볼 수 있어 다양한 문화가 섞여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아시아 국가에서 보기 어려운 키릴 문자가 간판을 채우고 있었기에 이 나라의 풍경이 더 낯설게 느껴졌다.


눈에 익은 건 신호등과 버스였다. 신호등은 생김새가 한국과 똑같았는데 제조업체가 한국인 것 같았다. 버스는 목적지가 몽골어로 쓰여있었지만 한국 지명과 브랜드 이름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한국에서 쓰지 않는 버스를 들여온 것 같았다. 당황스러웠던 건 교통 신호라는 게 크게 의미가 없어 보였던 점이었다. 보행자 신호등에 초록 불이 켜지고 다시 빨간 불로 바뀌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횡단보도 바로 앞에서 건장한 성인이 빠르게 걸어도 끝까지 도달하는 데 벅찬 시간이었다. 게다가 차와 보행자 모두 신호등을 그다지 신경 쓰는 것 같진 않았다. 보행자가 건너도 차가 지나갔다. 그래서인지 타이밍이 맞지 않는 신호등을 만나면 무단횡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



교통량에 비하면 사람들이 적은 편이었다. 서울에서는 거리를 걷다가 너무 붐벼서 타노스가 나타나 손가락을 튕겨 절반 정도 사라지면 좋겠다고 상상한 적 있는데, 울란바토르 거리는 군데군데 한산했고 군데군데 사람들이 몰렸다. 인구 밀도는 서울이 1㎢당 500명, 울란바토르가 340명 정도라고 하니 대충 1.5배 정도 타노스에 대한 염원이 실현된 듯했다.


길을 건너 국영백화점 쪽으로 쭉 걸었다. 10분 정도 더 걸으니 건물 위에 깃발이 나란히 꽂힌 백화점이 보였다. 그 옆에 있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한 골목으로 들어가니 카페 까미노가 있었다. 한국인 사장님이 운영해 관광객들이 찾아온다고 했다. 첫날의 불안함 때문이었는지 익숙한 공간에 가고 싶었던 것 같다.



사장님은 안 계셨지만 내부 인테리어에서 그의 모습을 가늠할 수 있었다. 음료를 주문하고 카운터를 등진 자리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인 관광객 무리가 들어왔다. 그들이 한국어로 주문하자 내게 영어로 주문을 받아준 카운터 직원이 유창한 한국어로 대답했다. 나는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힐끔 돌아봤다. 관광객이 그에게 사장님이냐고 묻자 "저는 여기 직원이고 사장님이 한국인이세요."라고 명확하게 말했다. 어순이나 시제, 높임말까지 군더더기 없는 대화를 이어나갔다. 타지에서 외국인을 통해 모국어를 듣자니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끝마치지 못한 일기를 채웠다. 시켜놓은 아이스 카페라테의 얼음이 녹아 밍밍해질 때쯤 카페를 나왔다. 골목을 반대로 나와 국영백화점으로 갔다. 전날 유심 개통하러 와서 내부가 눈에 익었다. 기념품숍, 마트 등 필요한 것들이 다 있었다. 마트에서 식재료와 과자, 맥주 등을 샀다. 백화점 맞은편에는 푸드트럭이 즐비한 거리가 있었다. 벤치에서 햇빛을 쪼이기 좋아 보였다. 날이 조금 풀리면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 같았다.



가득 채운 장바구니를 들고 집에 돌아왔다. 몽골에서 잘 먹고 잘 지낼 것이다. 매일 마주하게 될 것들을 온전히 느끼고 띄엄띄엄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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