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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짧음 Apr 06. 2024

관찰 1. 빨간불

빨간 신호등과 말씀 나누시던 분을 찾습니다.

크게 잘못한 것은 없는데, 이상하게 잘못된 느낌이 든다.

늘 남들처럼 살기 싫어했는데, 너무나도 남들처럼 살고 있다.


꼬장꼬장한 경상도의 작은 도시에서, 거기에 공무원이었던 아빠 밑에서 자란 것 치고는 꽤 급진적이었다. 지금이야 굉장히 흔한 댄스학원, 실용음악학원이지만 당시 그런 것 하나 없던 촌구석에서 나는 예술 고등학교 진학을 꿈꿨다. 학교 축제와 동네의 작은 행사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그 짜릿함을 일찌감치 깨우쳤고, 그 모습을 본 중학교 과학선생님의 권유로 조심스럽게 엄마와 아빠에게 말을 꺼내 보았다. 안타깝게도 돌아온 것은 “네가 허파에 바람이 들었구나!” 간결한 한 마디.


제1차 남들과는 다르게 항쟁이 진압된 이후로는 성실하게 공부에 전념했다. 영화관도 없고, 번화가라고 할 만한 곳도 없었기에 고등학교 시절 최고의 일탈은 야자를 째고 친구들과 오락실 노래방에 가는 것 정도였다. 딱히 놀 거리가 없으니 친구들이랑 야자 시간에 닭꼬치나 시켜 먹는 게 제일 재미있는 일이었고 운이 좋았던 덕분에 서울대는 못 갔지만 뭐 여하튼 그다음으로 좋은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다음인지, 다다음인지는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논란이 되는 부분이지만 나는 모교 중심적 사고를 할 것이다. 오늘따라 하늘이, 참 SKY가 푸르네 푸르구나.


서울에서 바라본 세상은 내가 알던 것과 많이 달랐다. 논술시험을 위해 매일같이 챙겨보았던 뉴스와 신문에는 나오지 않던 부조리한 일들이 많았고, 특히 내가 대학교에 입학한 08년도에는 광우병으로 인한 데모가 끊이질 않았다. 선배들은 술과 밥을 사준다고 나를 꼬셨고, 그 꼬심에 넘어간 나는 어느새 광화문에서 이순신 장군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옆을 둘러보니 꽤나 많은 선배와 후배, 동기들이 함께 하고 있었고, 우리들 사이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끈끈한 무언가가 형성되었다. 운동권의 표현으로는 동지애라고 한다. 나는 그 동지애를 바탕으로 3학년까지 학교에 남아 운동권 학생회장이 되었다. 금방이라도 젊은 당원으로서 정계에 진출할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애당초 1학년만 마치고 바로 군대에 가길 바랐던 부모님은 나의 일탈을 더 이상 지켜보지 못했고, 그 성화를 견디지 못한 나는 23살의 나이로 군 입대를 했다. 물론 하나, 둘 전역하는 동기들을 보면서 약간 쫄렸던 거도 사실이다. 제2차 남들과는 다르게 항쟁은 3년 천하로 마무리되었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강원도 인제군으로 자대배치를 받았다. 입대를 한 이후부터는 현실적인 고민을 하였다. 그래도 밥벌이는 해야 한다는 생각과 3년 간 운동권으로서 해 온 정치와 사회에 대한 고민, 그리고 나의 전공을 어떻게 버무리면 좋을까 생각했다. 정치외교학을 전공하기도 했고,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을 꿈꿨던 어린 시절의 꿈까지 보태지면서 나는 방송국에서 일을 해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PD가 되어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이야기를 하나의 작품으로 표현해 내고 싶었다. 전역 이후에 나는 PD와 기자 스터디를 찾아다니며 글을 쓰기 시작했고 처음으로 응시한 방송국은 서류와 필기시험까지 합격했었다. 아쉽게도 최종 합격은 아니었지만 26살이었던 나에게는 앞으로 많은 기회가 남아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여동생은 간호사로 취직을 했고, 아버지는 공무원 명예퇴직을 했다. 이제 우리 집안에 하나 남은 미해결 과제는 나였다.


당시에 인기를 끌었던 예능은 정글의 법칙이었다. 정시에 출근하고 정시에 퇴근하던 아빠와 그런 아빠를 바라보던 엄마의 눈에 PD라는 직업은 오지 탐험대였다. 하얀 셔츠를 입고 깔끔하게 차려진 사무실로 출근하기를 희망했고, 거기에 동생은 이미 취직을 했다는 사실과 또 거기에 퇴직한 아빠의 근심을 덜었으면 하는 눈치가 얹어졌다. 나는 PD를 준비함과 동시에 일반 기업체에도 원서를 넣기로 했고 이번에도 운이 좋았던 건지, 2군데의 대기업에 합격했다. 사람의 마음이 간사한 것이 눈앞에 명확하게 갈 곳이 정해지니 꿈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대한 의지가 많이 꺾였다. 이런저런 상황을 고려하니, 대기업이라는데 안 갈 이유도 없었기에 나는 27살에 취직을 했다. 제3차 남들과는 조금 다르게 항쟁이 취직으로 마무리되면서 나는 남들처럼 회사원이 되었다.


[우유 사러 가는 길, 빨간불에게 말을 건다]


그렇게 나의 항쟁은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보편적인 사회에서, 보편적인 회사원으로서 10여 년을 살아왔다. 똑같은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보내지만 매일매일 새로운 일들과 짜릿한 기억으로 가득찼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나를 위해 보내는 저녁의 한 두 시간, 주말의 몇 시간 정도의 기억만이 전부다. 특별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또 달리 특이한 것도 없다. 넘쳐나던 공상과 말장난들도 점점 시들해졌다. 다만, 하나 나의 뇌를 자극하는 것은 퇴근길에 마주하는 수많은 빨간불들이었다.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들의 브레이크등과 조금만 달려 나가려 하면 앞을 막아서는 빨간 신호등. (솔직히 초록색보다 자극적이어서 눈에 더 들어오는 건가 싶긴 하다.) 온종일 나 아닌 존재들을 위해 살았기에 조금이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눈 앞의 빨간불들은 그런 나를 성난 투우소로 만들어 버린다.


언뜻 생각하기에 빨간불은 부정적이다. 내가 살아온 삶에 대한 경고, 내가 살아가고자 하는 삶을 억지로 막아서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잘못해 왔나? 잘못하고 있나? 우유를 사러 가는 길, 횡단보도 맞은 편에 선 빨간 신호등에게 물어본다. 잠시 멈춰서 생각을 해 봐. 빨간불은 경고가 아니라, 휴식이다. 억지로 막아서는 것이 아니라 지친 나를 앉혀주는 것이다. 돌아온 길도 돌아보고 나아갈 길도 내다볼 수 있다. 이제 나는 주위를 돌아보고 같은 것도 달리 생각해 볼 것이다. 몇 시간의 삶이 아니라 온종일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살펴보고, 그것을 짧게나마 정리해 볼 것이다. 이런 잔망스러운 관찰의 삶이 보편의 삶을 벗어나기 위한 나의 보편의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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