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의서랍] 할머니의 부고

by 바스락

할머니의 부고 문자를 받았다. 작년 10월 첫 주의 연휴, 서울대공원 내 캠핑장 텐트에서 흥분한 아이들을 겨우 재우고 난 뒤였다. 집에서 혹시 연락이 오진 않았나 어둠을 더듬거려 핸드폰을 켜니 엄마에게 문자가 와있었다. “할머니 돌아가셨어. 우선 거기서 자고 내일 아침 10시까지 옷 갈아입고 00병원으로 와.”


“곧 돌아가실 것입니다”, “오늘을 넘기기가 힘드니 가족분들은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라는 의사의 말이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처럼 몇 주 동안 반복되고 있었다. 그래서 자리 비우는걸 망설이다 별일 없겠지 싶어 떠난 캠핑이었다. 의식이 없는 가운데에서 생체반응이 하루는 약해졌다 다음날은 회복되는 할머니에 대해 의사는 적잖히 당황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부모님으로부터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기다리는게 전부였으니, 딱히 캠핑을 가지 않는다고 해도 도움이 될 건 없었다. 오히려 부고 소식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 어느 순간 부고 소식을 목빠지게 기다리는 것 같았다. 차라리 한 발짝 떨어져 있는게 나을듯했다.


그렇지만 막상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으니, 캠핑장이 과연 부고소식을 듣기에 적합한 곳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톤다운된 베이지색 장비 등에 둘러 쌓여있다면 좀 괜찮았을 것 같기도 한데, 아이들의 성화에 급하게 캠핑을 시작한 우리 가족은 캠핑장 입구에서 빌린 빨강/ 파랑/ 초록 줄무늬의 요란스럽기 그지없는 침낭 안에 들어가 있었다. 핸드폰 불빛을 받은 반질반질한 침낭 재질때문에, 우리 가족은 반짝이는 원색의 애벌레 네 마리와 다름없었다. 꼴이 이러니 도저히 고인에 대한 경건한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머리맡에는 아이들이 벗어놓은 옷이 부산스럽게 널부러져있는 가운데 나는 베개대신 두루마리 휴지를 베고, 옷에서는 잠옷의 포근한 향 대신 장작불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이런 부산스러운 상황에서 누군가를 제정신으로 추모하는것은 불가능했다. 죽은게 우리 아이들이라면?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라면? 여러가지 상황을 대입해봤지만 마음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텐트 안으로 스며드는 냉한 공기가 오히려 정신을 또렷하게 하며, 할머니의 마지막 시간들을 복기하게 만들었다.


할머니는 한 번도 따뜻한 적이 없는 분이었다. “내 새끼”라면서 엉덩이를 두들겨주는 할머니는 드라마에만 존재했다. 나에게 할머니란 성적이 안 나온 사촌동생의 통지표를 찢거나 미국에 형제들을 보러 가기로 한 우리 엄마를 호통치며 주저앉히거나, 아프신 할아버지에게 역정을 내는, 그리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고집스레 홀로 30년을 지낸 사람이었다. 물건을 버리지 못하시고, 돈 쓰는것도 싫어하시는 할머니의 집은 80년대 만든 OB 맥주캔이 발견되고, 각종 은행 달력이 몇년치가 쌓여있고, 베란다에는 속에 (버리지 못한 자투리들이 검은 비닐 봉지에 담겨 산을 이루었다. 갈지 않아 밝기가 점점 시원찮아지는 조명 속에서도 벽지마다 때가 켜켜이 앉은것이 보이는 그런 곳에서 할머니는 본인의 노화 속도에 맞게 집을 조금씩 개조해가셨다. 국가 보조금을 받아 자동 높낮이, 등받이 조절 기능이 있는 병실 침대가 거실에 들어왔고, 그 옆엔 휠체어와 워커가 자리잡았다. 안전을 위해 화장실 문은 모두 떼졌다. 집값이 얼마라고 입에 오르내리는 압구정동의 아파트 안에 100세 할머니의 동굴이 자리잡고 있는줄은 맞은편 로데오 거리를 걸어다니는 사람들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집은 동굴이었지만 할머니는 꽤 건강하셨다. 병실 침대에서 주무시고 워커에 의지해야만 걸을 수 있을 뿐이지 정신은 그 누구보다 청명했다. 가요 프로그램 틀어놓고 리듬에 맞춰 상체를 들썩이셨고, 내가 101세 생신에 선물해드린 아이패드로 증손주들의 사진과 동영상을 카톡으로 확인하시며 몇 번이나 동영상을 돌려보며 곱다, 잘한다 라고 하셨다. 동사무소의 치매테스트에서는 당신 아들보다 높은 점수를 받으셨고, 가족들의 생일은 잊지 않고 10만원이 든 봉투를 건내셨다. 물론 어느 때부터는 생일축하한다는 봉투 겉면의 메시지는 우리 아빠에게 맡기긴 하셨지만 말이다. 할머니의 정정함은 식사시간에 절정에 달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본인 이빨로 고기를 씹어 드셨으니 말이다. 103세 봄에는 백내장 수술도 하셔서 생신선물로 드린 연분홍과 연보라가 어우러진 외출 모자를 보고 무척 마음에 들어하셨다. (눈에 잘 안보이던 때에는 이게 뭐니, 나는 잘 안보인다 - 라고 하셨다.) 나는 우리 엄마보다 할머니가 더 오래 사실거라고 나름 진지하게 믿었다.


그러다 여름 어느날, 할머니는 아침 안부 전화를 받지 않으셨다. 103세 할머니 걱정에 76세인 우리 아빠는 할머니댁에 부랴부랴 달려갔고, 곧이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가 밤에 이동하다 워커를 놓쳐 넘어지셨고, 어딘가가 부러졌고, 그래서 움직이지 못해 그 상태로 여섯일곱시간동안 계시다가 아빠에게 발견되었다고. 74세의 작은 아빠까지 오셔서 할머니를 침대 위로 옮기려고 했지만, 하반신이 움직여질때마다 너무 고통스러워하셔서 결국 이불을 펴고 거실 바닥에 누워계셔야했다. 장손인 아빠는 할머니 뜻대로 집에서 모시고자 했지만 통증, 생리작용, 식사 등 모든 부분에 있어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깨닫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손자, 사위가 동원되어 남자 넷이 이불 귀퉁이를 잡고 겨우 풍채 좋은 할머니를 들것에 실어 요양병원으로 보내기까지는 3일이 걸렸다. 첫날, 면회가 안되는 저녁 시간에 떠나야만하는 아빠에게 본인을 두고 가지 말라고 고래고래 호통을 쳤다는 소식은 할머니다웠다. 그러나 딱 그때까지였다. 기세, 욕심, 맑은 정신 등 할머니라고 할 수 있는 부분들은 시시각각 소멸하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세 명의 자식과 그들의 자식, 또 그들의 자식들은 번갈아가며 요양병원을 방문했다. 나는 텐트에 누워 병실에서 본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려봤다. 1인실이라지만 옹색하기 그지없는 좁은 방에서 발치의 하얀 벽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이 본인의 마지막이라고, 할머니는 상상이나 해보셨을까? 바람빠진 풍선처럼 본인의 기력과 욕심, 기억과 의지가 새어나가는 채, 나아서 나가는 곳이 아닌 죽기 전 머무는 곳이 된 병실에서 눈을 감고 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병실에서 얇은 눈꺼풀 겨우 한번 뜨고는 이내 감아버리는 할머니를 보며, 나는 차라리 할머니가 대부분의 시간을 눈을 감고 지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평생 아끼면서도, 좋은 것은 욕심내며 사신 분인데 볼 수 있는 풍경이 하얀 벽뿐이라면, 할머니라면 분명 화를 내셨을 테니까.


스르륵 잠이 들었다가 이웃 텐트의 부산스러운 기운에 눈을 떴다. 가족들에게 부고 소식을 알리고 재빨리 짐을 챙겨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10월이지만 여전히 따뜻하고, 산 속의 공기는 상쾌하고, 죽음이 뭔지 잘 모르는 아이들은 재잘재잘 시끄러웠다. 우리의 다음 목적지가 영안실이라는 사실이 낯설었다.

아이들이 놀라지 않게 "왕할머니가 돌아가셨어. 우린 이제 까만 옷을 입고 장례식장으로 갈거야." 라고 미리 설명해줬다. 차장 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긴 첫째와 달리, 아직 어린 둘째가 조잘댔다.

"왕할머니 이제 하늘나라 간거야?"

"응"

"그럼 이제 왕할아버지 옆으로 간거야?"

"아..그렇겠네. 그렇겠구나."


첫째의 시선 끝에는 하얀 구름이 걸려있었다. 아름답고 푸른 가을하늘이었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