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 생애 두 번째로 얻은 독립 공간은 회사에서 5분이면 갈 수 있는 분당의 오피스텔이었다. 1,000 세대가 넘는 대규모 오피스텔로 상업지구와 거리가 있는 다소 한적한 구역에 위치해 회사 기숙사라 불리던 곳이었다.
평수만 다를 뿐 똑같이 생긴 구조의 방이 위아래로 펼쳐진 이 개성없는 오피스텔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남산 타워가 코앞으로 보이고, 한 골목만 걸어나가면 아는 사람만 아는 재미있는 가게들이 펼쳐졌던 첫번째 독립에서 나는 이미 독립의 로망을 충분히 채웠기 때문이었다. 혼자라는 흥분이 가라앉고 달밤의 소월길 산책과 가게들에 익숙해질수록 불법 증축한 옥상 단칸방의 냉기가 더 시리게 느껴졌다. 회사를 왕복하며 도로에서 보내는 두 시간이 점점 더 아까웠다. 그러던 어느 날 앞 건물에서 베란다 문을 열어놓은 채 엉기적엉기적 나체로 걸레질 중인 외국인 남성과 눈이 마주쳤다. 그래, 독립 에피소드는 이걸로 충분해.
얼마 남지 않은 계약기간이 끝나자마자 나는 바로 회사 앞 오피스텔로 들어갔다. 첫 독립에서 최대한 돈을 아껴 궁색하게 살았던 것과 달리 벽이 반듯한, 아늑하고 안정적인 두 번째 집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우고 싶었다.
가장 먼저 스피커와 앰프를 샀다. 퇴사 후 카페 겸 라이브 공간을 운영중인 벨로주가 입문자를 위해 온쿄 앰프를 골라주었다. 그는 몇번이나 그닥 좋은 기기는 아니라 강조했지만, 기껏해야 볼륨을 15까지만 올릴 수 있는 오피스텔에는 차고 넘쳤다. 오디오를 들인 후 나는 종종 점심시간에 부리나케 집에 들렀다. 오피스텔 대부분이 비어있을 그 시간, 샌드위치를 먹으며 볼륨을 평소보다 높이고 노래를 들었다. 거실의 창 밖 풍경은 쨍한 날도 흐린 날도, 그대로 그림이 되었다.
그 이후로 집은 하나씩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졌다. 퇴근 후 목수일을 처음 배운 친구가 만들어준 자작나무 책장에서 책을 꺼내 야외용 핑크색 철제 의자에 앉았다. 발은 의자에 딸린 스툴에 길게 늘어놓는다. 가구 매입 담당 부서의 친구에게 부탁해 할인가로 구입한, 그러나 여전히 큰 금액이었던 조명의 은은한 불빛 아래서 책을 읽다 고개를 들면 맞은편에 세워둔 커다란 펭귄 그림이 보였다. 이태원의 친구 집에서 짐 취급을 받던 걸 발견해, 작은 차 지붕 위에 노끈으로 몇 번 감은채 분당까지 실어나른 그림이었다. 빨간 날개죽지의 펭귄이 오십 마리는 그려진 그 그림은 집에서 유일하게 소란스러운 물건이었다.
애정어린 물건들이 단정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던 집. 회사에서 어떤 하루를 보냈건 간에 일단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평온함이 온 몸에 퍼졌나갔다.
그 집을 떠난지도 벌써 10년이 지났다. 그 사이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겼다. 부모님과도 함께 살게 되었다. 대가족의 북적거림 속에서 내가 좋아하던 것들은 얌전히 가족의 것, 아이들의 것 뒤로 한발짝 물러났다. 온쿄는 아이의 동요 CD를 열심히 재생하다 고장났고, 그렇게 방치되다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영영 고칠 수 없게 되었다.
아이들의 동화책과 부품이 하나씩 사라진 알록달록한 장난감, 스프링이 나가버린 가족용 소파 사이에 앉아 있으면 그 평온했던 공간으로, 온쿄와 함께 사라진 그 시절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 아련해진다. 그래도 그 때를 떠올리면, 나는 잠깐이지만 분홍 의자로 돌아가 창밖의 노을을 바라볼 수 있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여전히 고요하고 아늑한, 나를 품에 안아주는 장소. 그곳은 대림 오피스텔 C 동 1101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