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어 아버지를 보다

by 선경

영화 ‘라스트 미션’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가족보단 일이 우선인 사람이다. 원예업을 하면서 상도 많이 받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럴수록 자신의 존재 의미를 일의 성취에서 찾았다.


일에만 너무 몰두하다 보니 딸의 결혼식에 갈 시간이 없었고 부인을 소홀히 대해 가족과 멀어졌다. 시간이 흘러 인터넷이 이끄는 새로운 변화를 무시한 죄로 그가 믿어왔던 원예 사업은 부도가 나고, 뒤늦게 가족을 찾아가 보지만 냉담한 시선만이 그를 맞이했다.


그는 당장 돈을 벌어야 했다. 트럭을 몰고 물건을 운반해 주었는데 알고 보니 마약이었다. 무엇을 배달하고 있는지 알게 된 후에도 큰돈을 받아 가족과 늙어버린 동료를 돕는 맛에 범죄를 멈추지 못했다.


평생 딱지를 떼어본 적도 없는 노인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경찰의 추격을 받지 않으며 순조롭게 임무를 수행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하지만 조금씩 덜미를 잡은 경찰의 포위망은 점차 조여진다. 게다가 아내가 죽음에 가까워지면서 주인공은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며 얽혀있는 문제를 해결해 보려 한다.


영화는 가족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었고, 특히 나에겐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빼빼 마른 몸과 주름진 얼굴 그리고 고지식해 보이는 인상이 일흔이 넘은 내 아버지와 많이 닮아 있었다.


어릴 적, 세상에서 가장 크고 강했던 아버지는 이제 화를 낼 기력도 없어 보이는 노인이 되었다. 과거엔 밤늦게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하는 소리만 들려도 큰소리로 나무랐는데, 지금은 물을 오래 틀어놓거나 심지어 컵을 떨어트려 큰 소음이 발생해도 별 반응조차 없다. 언젠가는 일부로 내가 발로 쿵쿵거리고는 ‘시끄럽다’라는 꾸중을 듣고 싶기까지 했다.


영화와 아버지를 너무 진지하게 생각했는지 꿈에 아버지가 등장했다. 주로 어릴 적 서먹서먹했던 아버지와의 관계가 파노라마처럼 이어졌다. 때론 무섭거나 서운했던 기억들이 여기저기 섞여 있었다. 꿈에서 깨었을 때는 뭔가 씁쓸함이 내 가슴에 맴돌았다.

아침의 무거운 마음을 뒤로 한 채 교회로 향했다. 내 기분과는 달리 가는 길에 벚꽃이 화려하게 피어 있었다. 설교 도중 목사님은 자신은 아버지에게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가슴에 불이 켜지는데, 나도 지금까지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란 말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당연히 나를 따뜻하게 안아준 기억조차 없다.


나의 아버지는 정직하고 이웃에게 한없이 친절했지만, 자식들에겐 감정 표현이 적은 시골 아저씨였다. 젊었을 때 의사를 꿈꿀 정도로 똑똑한 구석이 있었지만, 집안은 가난했기에 이상을 펼칠 수 없었다. 농사를 짓기 전 모두가 먹고 살기 힘든 시기에 보수가 좋단 얘기만 듣고는 중동으로 날아간 적도 있었다. 결혼하고 나름 의욕적으로 땅을 빌려 벼농사와 과수원을 해왔지만, 생각만큼 돈을 벌지 못했다.


아마 아버지에게 삶은 녹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못된 사람들에게 사기를 당해 한순간에 돈을 날릴 때와 소를 키우다 싼값에 팔아버리면 그제야 솟값이 오르는 일들이 일어났을 때, 가족 몰래 좌절했을 것이다. 태풍이 불어 사과가 우수수 떨어지거나 몸이 약한 어머니가 아파 쓰러져 있을 때는 남몰래 못하는 술을 한잔했을지도 모른다.


삶에 치이던 아버지에게 자신과 가족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사치가 아니었을까? 다행히 투박한 정이 있어서 가족을 위해 따뜻한 붕어빵을 사 오는 여유는 있었다. 그 빵에 따뜻한 말 한마디를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그 팥 속에 들어있는 수줍은 사랑만큼은 느낄 수 있었다. 표현하지 않아 보이지 않는 서툰 사랑일지라도 없는 것은 아니니까. 고지식한 아버지가 미울 때도 있었지만 내가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어가면서 그를 조금씩 이해하고 있다.


낮에 지나가며 본 벚꽃을 밤에 다시 한번 찾아와 바라본다. 햇빛에 찬란히 빛나던 벚꽃은 밤이 되어 왠지 슬퍼 보인다. 아마 빛나는 아름다움 속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어둠을 알아차렸기에 더욱더 애처로워 보이는 것임이라. 당당했던 아버지의 남모를 시름을 이해할수록 내 마음은 아리고 아리다.




[아버지를 본다]



지하철역 나와 집 돌아가는 길.


내 앞에 숙연히 나타난

작은 키 할아버지.


철 지난 잠바 쭈그러진 배낭 가방에

고향 찾듯이 고개만 두리번두리번

삶을 재촉하듯 걷는 할아버지.


강남의 눈 부신 네온사인과

건들거리는 문신 같은 조명,

베일 듯 각 세운 미니스커트의 화려함에 쫓기어

막다른 구석으로 몰리는데,


나는 왠지 측은하고

국밥 하나 사드리고 싶은 마음 들어

외로운 그림자 마지막까지 지켜본다.


그가 어둠으로 사라진 후

어젯밤 주무시는 아버지 떠올려 본다.


어깨는 찢겨진 옷처럼 허름하고

머리는 하루하루가 힘들었는지 푸석하며

가장의 책임감은 여전히 무거운지 수시로 잠을 청한다.


‘아버지’


이 호칭이 입에 맴돌아 수없이 부르고 싶은 날이 있다.

태산같이 우람한 어깨로 집을 지탱하고

삶을 호령하듯 웃던 모습이 그리웠던 걸까?


밤늦게 티비 보는데도

화낼 줄 모르는 지금의 그대에게

이젠 따지고 싶은 마음마저 든다.


마침 종소리와 함께 나타난 ‘시간’은

시계추처럼 고개를 저으며

입술에 시곗바늘을 가져댄 채

나에게 불허(不許)한다.


그를

열렬히 좋아하는 것

한없이 원망하는 것

영원히 지우는 것을.


단지 내 옆에 앉아

째깍째깍 등을 토닥이며

있는 그대로의 아버지

사랑하라고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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