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라는 그 상상공동체에 대해서
해외로 나갈 때마다, 녹색 여권(아직 그 예쁘고 푸르른 새 여권으로 바꾸지 않았다)을 들고 다닐 때마다 새삼스레 생각한다. 나는 한국인이라고. 사실 인식을 한다면 매순간 매순간이 그런 순간 뿐이다.
애초에 해외에서 나는 내 이름을 잃는다. 한국에서야 내 이름, 내가 사는 곳, 내가 하는 일 따위로 나를 이해하지만 해외에서 나는 그저 'Korean'일 뿐이니까. 내게 남은, 내가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나의 정체성, Korean.
그 감정은 해외에 있는 동안 때로 증폭되고, 때로 잊혀진다.
그 나라 사람이라면 아무렇지 않아할 풍경에도 괜스레 걱정하고, 꺼리게 될 때. 무언가 움츠러들게 될 때.
어딘가에서 들리는 익숙한 한국어를 만날 때. 혹은 한글을 만날 때.
그 나라의 문화, 시스템, 음식 등 무언가가 어색할 때. 조금 맞지 않는다고 느낄 때. 불편함을 느낄 때.
'그래, 난 한국인이었지'라고 생각한다.
음식을 먹고 무언가 비어 있다고 느끼며 매운 맛을 찾을 때,
'왜 다들 이렇게 문 닫고 쉬는거야?'라고 생각할 때,
식당 종업원들이 너무나 느리다고 생각할 때,
버스에서 먼저 일어나려다가 '도착하고 일어나야 하지'라고 생각할 때...
그러다 귀국하면 묘한 '국뽕'을 느끼는데,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마주하는 '환영한다'는 메시지다.
너의 나라로 돌아온 것을 환영해. 편하고, 안락하고, 익숙한 곳에 돌아온 것을 환영해.
그 길을 지나 '내국인' 길을 따라 그 어떤 것도 내게 묻지 않는 입국심사를 지나고 나면 내게 익숙한 언어로 가득한 공간들이 나를 맞이한다. 그 길을 지나는 수십여 분 동안, 나는 생각한다.
그래, 난 한국인이지. 그리고 여긴 나의 땅. 나의 나라.
해외에서는 내가 비록 조금 쫄고 불편했더라도, 괜찮아. 여기선 내가 주인이니까.
이곳은 나의 나라니까.
때로는 참으로 간사한 생각이라고 느끼기도 한다. 해외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2등 시민' 혹은 그 이하의 존재가 되지만 이곳에서 나는 '1등 시민'이니까. 그 누구에게도 내 존재의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고, 나의 정체성을 부연할 필요도 없으니까. 그 누구도 내가 이곳에 있는 걸 이상하거나 특이하게 여기지 않으니까. 이곳의 시스템은 나에게 익숙하고, 때로 그 시스템은 '나를 위해' 돌아가니까. 아주 사소한 불편함이 모였던 그 해외의 시간을 지난 만큼 달콤해진, '자국민'이라는 권력의 맛.
그 달콤한 맛이 얼마나 우연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나는 그저 한국인 부모를 통해 한국의 땅에서 태어났을 뿐이다. 물론, 그 우연은 그 모든 걸 가능하게 하는 기적과도 가까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신기한 게 사실이다. 나는 내가 한국인이 되기 위해 지불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납세의 의무'나 '국방의 의무' 따위를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난 그 이전에 한국인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내가 한국인으로서 삶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등가교환이라고 한다면, '한국인이라는 지위를 얻었다'는 것에서 내가 기여한 건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러니까 차를 얻기 위해 나는 '구매'도 해야하고 '유지비용'도 내야 하는데, 난 한국인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은 내고 있을지 몰라도 '구매는 한 적 없이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나는 그저 운 좋게 여기에서 태어났을 뿐이다. 나는 그 어떤 것도 기여한 바가 없다. 하지만 난 한국인이 됐고(정확히는 South Korean이라고 해야 할 수도 있겠다), 그 누구도 내게 내가 왜 한국인인지, 한국인이 되기 위해 무엇을 했노라고 따져묻지 않았다. 쉬운 말로, '날로 먹었다'. 어딘가의 누군가는 자신의 여권에 'Republic of Korea'란 말을 적기 위해 수 년이 넘는 시간을 들이고 있음을 생각하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얼마나 간편한가. 한국인으로 태어났기에, 나는 이곳에서 1등 시민으로서 안락함을 추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물론 이 모든 이야기는 몇 가지 문제를 잠시 잊어두고 말하는 것들이다. 내가 한국을 얼마나 좋아하고 또 싫어하는지, 한국에서 사는 삶이 얼마나 즐겁고 또 피폐한지와 같은 이야기들은 잠시 접어두자. 지금 내가 관심이 있는 건, '어떤 국가에서 태어나는 것'만으로, '그 국가에서 굉장히 많은 권리'를 획득함을 새삼스레 깨닫는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다(또는 어느 국가에 태어난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국가에 태어난 누구보다 훨씬 적은 권리를 획득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내가 누린다고 생각하지도 못하는 공기같은 존재들을, 해외에 나가고 나면 '그 모든 건 당연히 주어지는 게 아니구나'라고 느끼게 되니까.
가끔씩 다른 나라에 태어난 나를 상상한다. 미국에 태어난 나는 조금 더 스포츠를 가까워하는, 몸집이 커다랗고 시원시원한 사람이 되었을까. 그리고 영어를 쓸 수 있어서 편리한 삶을 살고 있을까. 이란에서 태어난 나는 이슬람교를 가지고 있었을까.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나는 무슨 일을 하고 있었을까. 독일에서 태어난 나는 조금 더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는 삶을 살고 있었을까. 일본인으로 태어난 나는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까. 국가는 그 사람의 수많은 것을 결정하고, 어느 국가에 태어났느냐에 따라 내 삶의 질도 천차만별로 달라졌을 것이다.
동시에 국가 차원으로도 생각한다. 우리나라가 유럽에 있었다면, 나는 인근의 수많은 국가들을 자연스럽게 오가며 공부하고, 일하고 있었을까. 우리나라가 중동에 있었다면, 나는 조금 더 복잡한 주변 국의 정세를 실감하며 살고 있었을까. 우리나라가 미국과 같은 나라였다면, 나는 전 세계인들과 마주하며 사는 것에 익숙할까. 끊임없이 다양한 민족과 국가가 교차하는 국가에 산다는 건 어떤 걸까. 한 나라의 언어가 여러 개고, 모두가 다른 정체성을 인지하고 있는 국가에 산다는 건 어떤 걸까.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대신 우리 땅을 지나간 수많은 역사를 공부한다는 건 어떤걸까. '여기까지는 내 역사, 여기까지는 너의 역사'라고 구분지을 수 없는 역사에서 나는 무엇을 느끼게 될까. 바로 옆에 서로 이동할 수 있는 국경이 있는 삶은 무엇일까.
내가 한국인이기에, 나는 국제적인 마인드가 부족하지는 않을까. 내가 한국인이기에, 나는 전 세계적으로 많이 쓰이는 언어를 별도로 공부해야만 하지 않을까. 내가 한국인이기에, 나는 보수적인 건 아닐까. 내가 한국인이기에, 나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어필하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내가 한국인이기에, 나는 때로 누군가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까. 내가 한국인이기에, 나는 보다 쉽게 내 삶을 더 좋은 형태로 영위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한국인이기에, 어느 나라에선 나를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을까. 내가 한국인이기에...로 시작할 수 있는 물음과 문장들은 수십 수백가지를 넘어선다.
대체 내게 한국이란 무엇일까? 또 그리고 국가란 무엇이란 말일까?
내가 얻겠다고 선택하지 않았던 이 정체성은 내 삶 대부분을 규정지었고, 그 공짜로 얻은 정체성에서 나는 때로 불안감을 느끼고 때로 절망하고 때로 안도하고 때로 기뻐한다. '나의 국가'로 돌아왔음에 감사하고 작은 국뽕을 느낀다. '너의 고국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말하는 나의 나라, '이 여권을 소지한 사람이 아무런 지장 없이 통행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고 필요한 모든 편의 및 보호를 베풀어주실 것을 관계자에게 여러분에게 요청한다'는 나의 나라. 내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가진 녹색(혹은 파란색) 여권이라는 작은 종이책을 통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수많은 상황까지 해결하고 피할 수 있게 해주고자 하는 나의 나라. 인천공항에서 느낀 국뽕이 사라지고 나면 '지긋지긋하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온갖 문제투성이의 나의 나라. 그럼에도 같은 국민들로서 너무나 편하게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정들에 즐거워하게 만드는 나의 나라.
이 커다란, 인류의 상상 공동체인 '국가'라는 존재는 얼마나 신기한 것인지. 나를 군대에 보내서 해외에 나간 내가 가끔씩 '나도 군인이었는 걸'하면서 '물론, 나도 접경지대에서 근무했고 총도 쏘고 다 했지'라고 너스레를 떨게 만들어 준 국가. 'BTS' 혹은 'PSY' 혹은 'SON' 혹은 'PARK'과 같은 사람이거나 'SAMSUNG'이거나 'SEOUL'이거나 'KIMCHI'거나 하는 존재로 사람들과 소통하게 하는 국가. 국가를 선택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아직 구체적인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 내 인생의 대부분을 규정지어버린 그 국가. 싫어하지만 또 좋을 수밖에 없는, 또 멀리하고 싶더라도 절대로 부정하거나 숨길 수 없는 정체성을 만들어버린 국가.
때로 나는 '국제적인 삶'을 상상한다. 다양한 국가로 이루어진 사람들과, 국가정체성 보다는 다른 목적이나 정체성을 가지고 이뤄가는 일상을. 누가 어느 국가인게 중요하지도 않고 궁금하지도 않아지는 삶. 그저 우리는 '인간'이고, 그 사람의 국가는 마치 그저 취미나 특기처럼 그 사람만의 재미있는 포인트가 되는 삶. 하지만 동시에 안락한 '내 국가에서의 삶'을 생각한다. 익숙하고, 편하고, 불안하지 않고, 그 무엇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삶. 내가 하고 싶은 건 비교적 쉽게 이루거나 준비할 수 있는 삶. 내가 이 시스템에 맞춘 것인지 이 시스템이 나에 맞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내 생활 패턴과 일체인 것만 같은 시스템속에서 많은 것을 예측할 수 있는 삶.
'해외 동포 여러분'이라는 무거운 문구도, '자이니치' 혹은 '고려인' 등의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비극도, '내 나라를 잃은' 사람들의 엄숙한 결심도, '국가 형성 과정' 자체가 분쟁의 이유가 되는 복잡한 고리도 내게는 없다(북쪽에 또 다른 한국이 있긴 하지만, 최소한 쟤가 왜 나랑 같은 나라야?라는 질문을 할 필요는 없으니까!) 운이 좋은 셈이다. 사실 그 무엇도 당연하지 않은 '국가'를 당연하게 여기는 내 삶도, 더 나아가 그 국가를 비판하는데 거리낌이 없는 모습도 누군가가 보기엔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겠다. 그저 '인천공항에 귀국할 때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따위의 이야기가 전부냐고 어이없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린시절 선생님으로부터 칭찬받을 만큼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던 그 아이는 어느새 '국가'란 그 신기한 개념 그 자체를 생각하게 됐다.
그러니까 국가가 무엇이길래, 대체 나라가 무엇이길래.
대한민국은 무엇이고, 내게 대한민국은 무엇이길래.
누군가에게 중국은 무엇이고, 누군가에게 튀르키예는 무엇이고, 누군가에게 수단은 무엇이고, 누군가에게 인도네시아는 무엇이고, 누군가에게 조지아는 무엇이고, 누군가에게 스웨덴은 무엇이고, 누군가에게 뉴질랜드는 무엇이고, 누군가에게 콜롬비아는 무엇이고, 누군가에게 이탈리아는 무엇이고, 누군가에게 알바니아는 무엇이고, 누군가에게 몽골은 무엇이고, 누군가에게 모로코는 무엇이고, 누군가에게 온두라스는 무엇이기에.
우리는 이렇게나 다른 삶을 살게 되고, 다른 것을 생각하며, 다른 것을 보게 된 것인지.
왜 어디에서는 국가란 이름으로 전쟁을 하고, 국가를 이유로 다투고, 국가를 이유로 누군가를 떠받들고,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고,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인지. 어느 유튜브에서 본, 한국으로 귀화를 선택한 한국인의 질문을 나 스스로도 던질 수밖에 없다. '내게 한국은 무엇일까?'라고. '나는 어디나라 사람이지?'라고 단 한 번 추호의 의심조차 할 수 없었던 나의 국가, 한국은 무엇인 거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