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도 아닌 직장인이 사진전을 기획하고, 준비하고, 마치는 이야기
지난 24.8.16~24.8.18, 개인 사진전을 열었다.
미리 밝혀두지만, 나는 사진을 업으로 하고 있지 않다. 아무 상관 없는 곳에서 일한다.
그저, 어린 시절부터 사진을 찍어온 사람으로서 혼자 전시관을 대여해서, 사진전을 준비했고, 열었다.
"중 1때부터 3천 장 이상 찍었습니다. 대부분이 제가 좋아하는 '맑은 하늘'이 담긴 사진입니다. 그게 제 10대였습니다" - 2011, 하자센터 스토리콘서트 발표 중
10대 시절, 휴대폰 카메라로 3천 장의 하늘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게된 건, 맑은 하늘을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예쁘기도 했지만, 그걸 보고 있으면 감정이 일렁거리기도 했지만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당시 비가 무서웠던 나는 비가 세차게 오는 날이면 하늘 사진을 보고는 '이 비도 지나가고, 다시 맑아질 것'이라고 속삭였다.
그렇게 사진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고등학생 시절 할아버지는 당시 노인정 업무용으로 쓰이던 작은 디지털 카메라를 넘겨주었다. 더 이상 비가 무섭지 않게 된 때에도, 나는 카메라를 들고 다녔고 사진을 찍었다. 어느샌가 '메인 직업은 아니더라도, 사진 작가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진이 내게 주었던 위로를, 사진을 보면 떠오르는 수많은 기억과 감정을 사람들과 나누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30살이 넘은 어느 날, 사진 작가가 되긴 글렀다는 생각이 스쳤다. 사진 작가는 되지 못하더라도 사진전은 열 수 있지 않을까. 10대 시절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사진을 찍었던 아이가 품었던 소망을 이뤄줄 수 있지 않을까. 그 마음으로 전시를 열었다. 새벽 효, 향기 훈. 이름의 한자에서 전시 이름을 땄다. 인생의 새벽인 10대 시절부터, 그간의 사진을 정리하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정리해 본다.
사진을 10대부터 찍었다. 비가 오는 게 두려웠던 당시, 맑은 하늘을 휴대폰으로 찍기 시작했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똑딱이 디카를 선물 받았고, 매일 학교든 어디든 들고 다니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찍었다. 이후엔 카메라를 직접 사서 세상을 기록해왔다. 배운 적도 없고, 여전히 카메라를 잘 다루지 못한다. 이전 글 <사진을 찍는 취미를 가졌다는 것>에서도 밝혔지만, auto 모드로 찍고 후보정을 조금 건드려보는 수준이다.
그런 내가 사진전을 열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열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사실 거창한 이유는 없다. 2024년을 시작하며, 몇 가지 목표를 세웠다. 물을 자주 마신다는 작은 목표부터, 한 해가 가기 전에 이뤘으면 좋겠는 큰 프로젝트도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사진전이었다. 사진전을 고른 이유도 단순했다. 인생에서 언젠가 해보고 싶었던 목표였는데, 이런 식으로 구체적으로 하겠다고 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사진전이 인생의 목표였던 이유도 별 건 없다. 사진과 친해진 나는, '나중 언젠가에 사진 작가를 겸업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보면 책도 하나 내고, 사진전도 열겠구나 생각했다. 목표를 세우려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진 작가가 되긴 글른 것 같다. 그러면 사진전이라도 열어보자 싶었다.
어린 시절 사진과 친구가 되었던 아이의 소망을 이뤄주고 싶었다.
한 해라도 더 가기 전에.
현실적으로 괜찮은 기회도 있었다. 다니는 회사에서 5년을 채워 리프레시 휴가를 쓸 수 있었다. 지난 3년 차 리프레시 휴가를 작년에 쓰기도 했고, 작년-올해 여러 번 해외를 다녀왔던 터라 해외를 갈 돈도 생각도 없었다. 2주가 넘는 휴가 기간 동안 사진전을 준비하면 되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올해 목표로 세웠던 사진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더워지기 시작한 6월 9일, 그동안 지켜봐왔던 공간 중 하나에 연락을 취해 공간을 둘러보고 전시 일자를 정해 예약했다. 구의역에 있는 지하 공간이었다. 살고 있는 강동구와 가까웠고, 공간도 넓었고, 가격도 맘에 들었다.
사진전 준비는 지지부진 했다. 공간 예약하고 나서 아무 것도 하지 못했고, 7월이 되어서야 포스터를 부랴부랴 만들어 주변에 알렸다. 네이버를 비롯한 곳에 전시 정보를 등록하기도 했다. 그 외에는 어느 것도 진척되는 것이 없었다. 6-7월의 나는 회사 일도 바빴고, 다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들도 있어 정신이 없었다. 아직 한 달이나 남았다는 생각에, 리프레시 휴가 기간 동안 하면 된다는 생각에 미룬 것도 사실이었다. 공간을 예약한 날 기획서를 써둔 것 외에는 진행된 게 없었다.
제대로 된 준비는 리프레시 휴가가 시작한 8월 초에 시작했다. 10대 때부터 보관하고 있던 사진들 전부를 다시 들여다 보았다. 다 합치면 몇 만 장은 될 기록들이었다. 그 중에서 1차로 사진을 추렸고, 공간을 어떻게 나눌지를 기획했고, 어떤 주제로 놓을지를 정했다. 10대 시절 사진을 시작하던 당시와 여행 사진, 올림픽공원 사진, 기타 잘 찍었다고 생각했던 사진들 따위였다. 2달 전 쓴 기획서를 들여다 보며 어떤 사진전이 되면 좋을지를 궁리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복병은, 바로 감기 혹은 코로나에 시달렸다는 것이었다. 리프레시 휴가 전 주에 걸렸던 감기를 앓고 지나갔는데, 낫고 나서 며칠 뒤인 다음 주에 다시 걸렸다. 고열과 오한에 시달렸고, 컨디션은 난조였다. 휴가 기간이라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분명히 다행이었지만, 새벽엔 고열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시간에 보통 부족한 잠을 보충했고, 오후와 저녁에 약의 힘을 빌려 상태가 조금 괜찮아지면 사진전 준비를 했다. 써야하는 원고도 있어 원고작성과 병행하기도 했다.
불과 2주 전 일이지만, 한참 전 일처럼 멀게 느껴지는 그 시기는, 인생에서도 손꼽을만큼 괴로운 시간이었다. 매일 밖에 나가야 성에 차는 내가 며칠이고 집에 틀어 박혀 혼자 아파하고, 걱정하며 병과 싸웠고 임박하는 날짜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전시회 준비에 몰두했다. '왜 미리 해놓지 않았을까' 후회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어쨌거나 무슨 일이 있어도 시간 내에 해내야 했다. 이렇게 하는게 맞는지 돌아볼 여유는 존재하지 않았고, 마감의 압박과 병마와 싸우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며(겁이 많아, 고열에 시달리면 걱정하기 바쁘다) 상태는 예민해져만 갔다.
고등학생 시절, 똑딱이 디지털 카메라를 매일 학교에 들고 다녔다. 쉬는 시간, 하교길, 체육 시간 언제 어디서든 학교를 찍고 친구들을 찍었다.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다가도, 자전거를 타고 집에 가더라도 하늘이 예쁜 날이면 올림픽공원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 나는 언제나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학생'이었다. 그렇게 카메라가 친숙해졌다.
'사진'이 내 인생의 주요한 기점이 되는 순간은 중3 때였다. 여름방학을 시작하던 날, 담임 선생님은 '매그넘 사진전' 3천원 할인권을 들고 있었다.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가져도 되냐'고 했고, 그 사진전의 마지막 날 그 할인권만을 들고 예술의 전당을 찾았다. 기껏 동네만 돌아다녀 봤던 내가, 형에게 교통카드를 빌려 3시간이 넘게 혼자 길을 찾으며 예술의 전당을 처음 갔다. 그곳에서 또 2시간 넘게 기다려서 사진전을 봤다.
혼자 온 10대라고는 나밖에 없는 것 같은 그곳에서 세상을 담긴 사진전을 보며 '어른이 된' 것만 같았다. 어느새 어둑어둑해진 시간, 처음 보는 길들을 지나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스스로 '얼마나 큰 사건을 겪었는지'를 생각했다. 그 이후 매년 사진전을 찾았다. 사진 안에 담긴 수많은 의미를 마주하는 게 좋았다. 사진은 나를 좀 더 다른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사진은 내 삶의 일부가 됐다.
- 전시 문구 중 일부
그래도, 어쨌거나, 전시 설치 3~4일을 앞두고 메인 준비물들의 주문을 넣을 수 있었다. 사전에 연락을 통해, 설치 전에 배송받을 수 있는 점도 체크했다. 하루하루 퀘스트를 깨듯 업체를 찾아 주문을 넣었고, 마지막으로 사진전에 함께할 텍스트들 인쇄도 오프라인 킨코스를 찾아가 맡기면서 그 퀘스트들은 끝이 났다. 그 날, 2주만에 편한 마음으로 낮잠을 잤던 것으로 기억한다. 두번째 걸린 감기(혹은 코로나)에 체력이 놀랄만큼 떨어져 있어서, 킨코스에 다녀오는 1시간 정도의 외출도 쉽지 않았다.
다행히 대부분의 물건을 제 때 받을 수 있었고, 전시 설치하는 날 즈음에는 몸도 어느정도 회복된 상태였다. 낮에는 설치를 위한 물품을 샀고, 저녁에 전시장을 찾아 빈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수많은 박스와 포장을 풀었고, 붙여낼 사진들과 텍스트들을 정리했다. 개인 전시를 치뤄본 경험이 있는 애인이 도와줬기에 다행이었다. 일부 요소들의 위치를 바꾸기도 하고, 그때그떄 회의를 하며 전시 설치를 했다. 설치 준비는 밤 12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놀라운 순간이었다. 집에 돌아오는 택시에서, 이 모든 과정이 꿈만 같았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설치는 완벽하지는 않았다. 전시를 진행하는 내내 지속적으로 보수 작업을 했고, 영상 작업을 까먹는 탓에 그날 부랴부랴 영상을 만들기도 했다. 전시 당일에 퀵으로 받기로 했던 물품은 팸플릿만 포함되어 있었고, 관객 선물로 준비한 엽서는 결국 전시가 끝난 뒤에야 배송을 받을 수 있었다. 처음 전시를 준비하며 생각했던 것이 10가지라면, 이래저래 사유로 6-7가지만 완성된 상태였다. 홍보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선물로 주려고 했던 것들도 거의 실행하지 못했다. 그래도, 어쨌거나 전시 준비는 끝이 났고, 이제 남은 건 손님들을 맞이하는 일 뿐이었다.
여행을 가서 카메라를 들고 있으면 관찰자가 된다. 마트의 물건들과 가격을 찍고, 버스 내부 설계를 찍고, 대중교통 체계를 찍고, 표지판을 찍고, 출근 길을 찍는다. 가게의 문을 찍고, 도로를 찍고, 나무와 자전거를 찍는다.
여행지에선 걸음이 느려진다. 고개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세상을 관찰한다. 이곳은 우리와 어떻게 다른지, 무엇이 다른지, 아주 작은 체계의 차이라도 알고 싶고, 기록하고 싶다. 앞만 보는 대신 올려다보고, 내려다보고, 몸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새로운 시야 각도를 만드는 일이 즐겁다.
관찰하지 않았을 뿐, 세상엔 신기한 것들이 많으니까. 시선을 두지 않았다면 몰랐을 디테일들이 있으니까. 카메라를 들지 않았다면 몰랐을 세상이 있으니까. 카메라를 매고 있는 나는, 세상과 조금 동떨어진 존재가 되는 것만 같다.
- 전시 문구 중 일부
처음에 사진전을 준비하며, 어차피 지인들만 올 것이라 생각했기에 '50명 정도 오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는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주었다. 너무 감사한 일이었다. 전시를 시작한 금요일도, 평일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 내 생각보다 훨씬 바쁜 하루였다. 전시장을 닫고 퇴근하는 버스에서, '이렇게 몸이 녹초가 된 적이 있던가' 생각했다. 과거 행사 단기 알바를 하던 때나 이 정도로 체력을 썼던 것 같다. 전시를 난생 처음 열어본 사람은 손님이 올 때 단 한 순간도 앉지 못하고 서서 전시장을 돌아 다녔고, 그만큼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문 닫을 때 쯤 찾아온 친구와 저녁을 먹고 겨우 집에 갔다.
둘째날과 셋째날은 체력 안배를 고려하기도 했고, 다행히 나날이 체력이 회복되면서 첫째날보다는 버틸만 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자리에 앉아 휴식을 취한 덕분이기도 했다. 그렇게 손님들을 맞았고, 문을 닫았고, 아침엔 전시장을 열러 출근을 했다. 마지막 날은 동네 친구들이 마지막으로 전시를 본 다음 함께 해체 작업을 했다. 저녁을 먹은 뒤 시작한 해체 작업은 다행히 빨리 끝낼 수 있었고, 친구의 차에 모든 전시 물품과 선물, 꽃들을 가득 채운 뒤 집에 돌아왔다. 그 짐들을 정리하고 전시회 기간동안 전혀 신경쓰지 못했던 집을 청소하는 데만 2시간이 걸렸고, 아직도 일부 짐들은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다.
어쨌거나, 나의 사진전은 끝이 났다. 사람들은 내게 '다음 전시는 언제냐'고 물었지만 늘 '다음이 있을까'라며 웃으며 대답하곤 했다. 인생에서 한 번 쯤은 하고 싶었던 숙제였고, 프로젝트였지 두 번째와 세 번째를 생각하지는 못했다. 난생 처음 전시를 열어본 사람이, 사진이라곤 제대로 찍지도 못하는 사람이 사진전을 기획했고, 어쨌거나 설치를 했고, 어쨌거나 손님을 맞았고, 어쨌거나 해체를 하며 전시를 마쳤다. 꿈과도 같은 일이다. 정말 괴로웠고 체력적으로 힘에 부쳤지만 그보다는 감사함이 압도적으로 큰 시간이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3일 간의 전시가, 3개월 간 준비한 전시가, 18년 간 찍었던 사진들을 정리한 전시가 있었고, 끝이났다.
'무엇이 남았냐'고 한다면 강렬한 감정과 방명록을 꼽겠다. 방문한 사람들이 일일이 적어준 방명록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 리스트에 꼽힐 것만 같다. 바빴던 시간들은 장면으로만 기억되지만, 몸둘바를 몰랐던 강렬한 감정은 아직 그대로 가슴에 남아 있다. 바로 미안함과 감사함이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사진들을 보러 오느라 시간과 선물을 쓰게 한 미안함이, 그럼에도 찾아주어 따뜻한 말을 건네주고 축하해주는 마음에 대한 감사함이다. 전시를 하고 집에 돌아오는 때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하나'라는 생각 뿐이었다. 그렇기에 계획대로 사진전에 썼던 사진들과 늦게 배송받은 엽서들을 어떻게 나눌지에 대한 고민이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라도 찾아준 사람들에 대한 감사 표시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제대로 알리지도 못했는데 카카오톡과 인스타그램을 통해 소식을 접하고 찾아와준 오랜 인연들, 다양한 꽃과 선물들을 들고 찾아와 준 마음들, '무엇을 주어야 할까' 고민이 엿보이는 따스한 선물들, 먼 곳에서 굳이굳이 시간을 내고 오랜 시간을 들였던 사람들, 혹시 저녁을 제대로 챙겨 먹었을까를 생각하며 문 닫을 때 쯤 와준 친구들, 사진들에 대해 칭찬을 해주며 용기를 복돋워준 언어들. 여러 이유로 찾아오지 못하지만 따스한 메시지를 보내주었던 인연들. 웃는 얼굴로 함께 해체를 해주었던 동네 친구들. 전시 준비부터 설치까지 함께 해주었던 애인. 전시장을 내려오는 발소리부터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고 방명록에 편지를 적고 선물을 주고받는 순간들, 사진을 설명하고 농담을 나누던 시간들.
그 모든 순간순간이 모두 감사함으로 가득차 있어 지난 2주 간의 고생과 힘듦이 멀어져만 가는 3일이었다.
걱정이 많은 나는 '몸 상태가 이래가지고서야 다시 일상 생활로 돌아갈 수나 있을까'라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그 시간들을 지나 전시장에 3일간 출근을 했고, 날이 갈수록 나의 체력은 더 상태가 좋아졌다. 아무리 힘들어도,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하던 때도 짜릿했지만, 살면서 이 정도로 응원과 에너지를 받았던 때는 없었던 것 같다. 인생의 목표였던 프로젝트였던 만큼 인생 전체를 돌아보았을 때도 기억날 만큼 수많음 감정이 쌓이고 폭발하던 3일이었다. 그 3일 간 제대로 청소도 못하는 집에 돌아와 겨우 쉬며 잠을 청하고, 다시 출근하던 때에는 보다 쉽게 눈물을 보였던 것 같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을 꼽으라고 하면, 올림픽공원이다. 계속 이 주변을 살았고, 자주 찾았고, 수많은 기억을 쌓았다. 10대 시절 공부를 하다가 사진을 찍으러 공원에 왔고, 친구와 애인과 공원에 왔다. 농구를 배우던 시절도 매주 이곳에 왔다. 이곳을 찾은지 거의 30년이 되가는 지금도, 퇴근하고 굳이굳이 자전거를 타고 가고, 주말에도 이유없이 찾는다.
목 문제로 어지럼증이 찾아왔던 때엔 올림픽공원에서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아침 8시에 시작하는 수업을 듣고 샤워를 한뒤 따릉이를 타고 올림픽공원 끝에서 끝을 다녔다. 몇 개월을 괴롭힌 어지럼증 문제가 사라지고 있다는 기분으로 아침의 조용하고 상쾌한 올림픽공원을 달리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희망'이라는 감정이 이런 거구나 하는 마음이었다. 우울이 찾아왔던 코로나 시기에도 찾았다. 공원만큼은 제한 없이 다닐 수 있었고, 그곳에 앉아 사람들을 바라보고 마음을 달랬다.
올림픽공원이 좋은 건, 행복의 감정이 이 안에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공원에 온 사람들은 모두 웃고 있다. 대화를 나누고, 여유를 만끽한다. 돗자리를 펴고 누워있는 사람들, 배드민턴을 치는 가족들, 결혼 스냅을 찍으러 온 예비 부부, 러닝을 하는 사람들, 어린 아이와 놀아주는 부모님... 나홀로 나무 위 언덕에 앉아 사람들의 면면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 삶이 무엇인지, 즐거움이란 무엇인지를 알 것만 같다. 그만큼 공원에서는 다양한 풍경을, 사람을 찍을 수도 있다.
언제나 나를 품어주고, 위로해주고, 힘겨운 시기를 이겨내게 했던 곳인 올림픽공원. 사진전을 준비하며 메인 사진을 고를 때도 고민은 쉬웠다. 올림픽공원 사진을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으니까. 공원의 순간을 담은 사진이, 그 때의 행복과 웃음도 함께 담아내고 있다면 좋겠다.
- 전시 문구 중 일부
사진전이 끝나고, 4일 간의 짧은 휴식도 지나고 이제 나는 다시 출근을 앞두고 있다. 3주에 가까운 휴가 기간 대부분 동안 나는 아팠고, 두문불출하며 침대와 컴퓨터 앞을 오가며 전시 준비를 했다. 체력이 모두 소진된 듯한 기분을 느끼며 퇴근을 했고, 다시 충전된 에너지를 바탕으로 전시장 문을 열었고, 사람을 맞았다. 그렇게나 긴 휴가가 이렇게나 짧게 지나갈 수 있을까 싶다. 제대로 놀거나 쉬지 못해서 아쉬운 마음도 살짝 든다. 하지만 인생에서 이런 순간을 맞이할 수 있었음에 감사함이 훨씬 크다.
정말 보잘것 없는 나의 사진을 보러, 아직 사회화도 덜 되고 부족한 나를 응원하기 위해 먼 길, 기꺼이 시간을 내주었던 마음을 마주하는 일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지는 기분이었다. 무릎꿇고 있는 내게 그 수많은 사람들이 다가와 어깨를 토닥여주고, 각자가 줄 수 있는 응원의 방식으로 전하고, 웃는 얼굴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그 시간동안 나는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하고 무릎 꿇은 채 압도적인 미안함과 감사함을 느낄 뿐이었다. 이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하나에 무거워진 마음을 느끼며, 그들이 전해준 응원을 자양분 삼아 힘을 냈다.
나는 나약한 인간이다. 스스로 잘 알고 있다. 10대 시절 찾아온 공황장애는 여전히 내 옆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나를 찾아온다. 비가 내리는 날 찾아오는 공황이 두려워 집 안으로 숨었던 소년은 사진을 친구로 비를 맞는 법을 배웠고, 이제는 비 맞는 일을 즐길 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이겨냈지만, 여전히 겁이 많고 걱정이 많은 나약한 나는 조금만 둑이 무너지는 날엔 다시 공황 앞에 무력해지고 만다. 전시가 끝나고 탔던 지하철에서도 오랜만에 공황을 다시 겪을 만큼, 나는 나약하다.
사진전은 그 모든 나를 마주보는 작업이었다.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사진을 찍었던 날부터, 사랑하는 사람들을 렌즈 안에 담아 즐거운 현재를 꼭 잊지 않기 위해서 찍었던 날들, 마주하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기록하고 싶었던 날들, 조금 다른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었던 날들, 사람들에게 사진을 선물하고 싶었던 날들, 중3 시절 몇 시간을 들여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매그넘 사진전'을 보러 찾아갔던 '인생의 사건'이 있던 날, 그 이후로 매년 사진전을 갔던 날들, 세상에 나를 증명하고 싶던 날들, 함께 하는 행복한 순간을 잊고 싶지 않았던 그 모든 시간들.
가장 두려운 순간에,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사진들을 보며 이겨내고 싶었던 마음들.
그 오랜 시간들을 마주하고 정리하는 일이었다. 집의 모든 커튼을 치고 창문을 닫던 10대의 소년에게 찾아가, 언젠가 날은 맑아지고 비는 그친다고. 세상은 아름다움으로 가득차 있다고. 우울해하고 죽음을 생각하기엔 이 세상과 너에게 남은 가능성은 너무나 크다고. 너가 찍었던 수 천장의 하늘 사진들은 하나하나가 쌓여 너의 마음 속에 남아 힘이 된 거라고. 그 힘들이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아직도 세상을 마주하는 에너지가 되고 있다고. 사진을 잘 찍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내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찍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두려워하지 말고, 돌아서지 말고, 계속하라고. 무엇이든 괜찮으니 나아가라고. 그것이 의미가 되고 선물이 되는 때가 온다고.
14살의 나는 31살의 내가 그 모든 순간들을 사진으로 엮어 전시를 열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홀로 사진전을 보는 여행을 떠난 16살의 나도, 매일 카메라를 들고 등교하던 18살의 나도, 마음이 힘든 날 '출사'라며 서울 곳곳을 찾던 20살의 나도, 돈을 모아 처음 캐논 100D 중고를 사는 23살의 나도. 이 사진전을 생각하며 사진을 찍지는 않았다. 그 순간의 나를 위해 찍었을 뿐이다. 언젠가 이 사진들을 돌아보며 힘을 얻고 내일을 살아낼 희망을 찾아낼 나를 위해 찍었을 뿐이다.
그 사진들을 정리하고자, '너의 그 모든 순간은 이렇게나 의미가 있었고 찬란했다'라고 그 때의 나에게, 지금의 나에게 전하고자 했던 사진전이 누군가에게 즐거움이 되었다는 것 자체로 감사하다. 그 사진들에 내 생각을 담았던 텍스트들에 '기억에 남는 문장이라며' 스티커를 붙여주었던 마음들에 감사하다. 사진들에 붙었던 수많은 스티커들을 보며, 수많은 응원이 담긴 방명록을 보며, 여전히 사진은 나를 위로해주는 친구라는 확신이 든다. 그리고 내가 해왔던 이 일들이 나 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구원할 수 있는 순간을 선물해줄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행복한 순간이 언제인가?라고 물으면 어린 시절에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낼 때'라고 대답했었다. 최근엔 늘 '따릉이를 타고 음악을 들으면서 올림픽공원을 돌아다닐 때'라고 답하고 있다. 행복의 조건이 날이 갈수록 더 쉬워졌으면 좋겠고, 행복을 더 자주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 전시 문구 중 일부
감사하다. 3일 간의 모든 순간들에. 감사한다는 말로도 표현이 부족할 만큼 감사하다.
수많은 아쉬움이 있었지만, 이젠 그 모든 것들이 아무 상관 없을 정도가 됐다.
인생에서 이만한 사건이 있었을까 싶다.
2006년, 14살에 시작한 사진과의 작업은, 2024년, 31살에 한 바퀴를 돌아 사진전을 열며 한 챕터를 닫았다.
이제 다음 챕터를 담담하게, 늘 그래왔던 것처럼 시작하면 된다.
이 모든 순간들이 엮어내고 만들어 낼 미래의 기적과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수백장을 찍고 돌아온 날 사진을 고르며 스스로가 갑갑해질 때가 있다. 고작 이 정도 사진밖에 찍지 못할 거라면, 나는 왜 사진을 찍는가? 왜 사진찍기라는 취미가 있다고 말하고, 또 생각하는 걸까? 취미라고 하기엔 아직 발걸음도 떼지 못한 수준이라면 접는 게 낫지 않나? 내가 '사진을 찍는다'라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저 '사진 찍는 나'라는 것에 취한 걸까? 이 모든 건 일종의 허세인걸까? 예전처럼 카메라를 열심히 들고 다니지도 않는데, 그럼 그냥 그렇게 천천히 접어도 되는 건 아닐까?
하지만 안다. 내게 사진은 그런 게 아니라는 걸. 하늘이 좋아 수천 장의 하늘 사진을 찍었던 중학생, 자기가 마주하는 모든 모습을 기록하던 고등학생, 혼자서 '이것도 출사'라며 돌아다니면서 제멋대로 셔터를 누르다가 돌아왔던 대학생 시절, 그 모든 시절에 내게 사진은 '잘 찍기 위함'이 아니었다. 좋은 사진이나 멋드러진 사진을 찍으면 좋겠고 나름 사진 중 잘 나온 걸 볼때마다 한없이 뿌듯하지만, 내게 사진이란 그 결과물보단 '행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사진을 찍는 순간, 나는 멈춘다. 어딘가에 시선을 보내고, 그 세상을 카메라라는 기기에 담아낸다. 그 짧은 몇 초의 시간을 위해 나는 늘 주변을 헤맨다. 길을 걷다가 하늘을 보고, 하늘이 예쁜 날에는 그 모습을 찾아 공원으로 달려 간다. 길거리를 걷다 괜스레 바닥의 문양을 보고, 특이한 간판을 보고,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보고,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를 보고, 붉게 져가는 노을을 보고, 나무를 보고, 도보 블럭 사이에 핀 꽃을 보고, 거울처럼 세상을 비추는 물 웅덩이를 보고, 환하게 웃는 친구를 보고, 달라진 동네 풍경을 본다.
수 천, 수 만 장의 사진 속에 내가 바라본 세상이 겹겹이 새겨져 있으니까. 그냥 지나치면 모르고 관심두지 않았으면 알 수 없었던 세계가 그곳엔 있으니까. 그 모습에 희망을 품고 기뻐했던 내가 있으니까. 사진을 취미로 하고 있다고 하기엔 우스운 나도 여전히 사진을 찍는다.
-- <사진을 찍는 취미를 가졌다는 것>, 2023,08.02, 브런치, 전시 문구에 활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