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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 읽기 챌린지

밀리의 서재에 민음사가 들어오다

by 글쓰는 변호사

최근 밀리의 서재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 들어왔다. 전체는 아니고 약 100권 정도가 서비스가 된다. 밀리의 서재에는 좋은 책이 많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출판계 4대장이라 할 수 있는 민음사, 문학과 지성사, 창비, 문학동네 책들은 거의 없었다. 굳이 밀리의 서재에 들어오지 않더라도 책이 팔린다는 뜻이기도 할 테고, 한국 출판계를 지탱하는 대형 출판사로서 종이책을 지키겠다는 자존심으로 생각되기도 했다. 나는 그 출판사들이 계속 자존심을 지키기를 바랐고, 그 자존심을 지지했다.


그런데 최근 밀리의 서재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약 100권이 서비스가 되기 시작했다. 아내와 나는 "민음사가 결국 무릎을 꿇었구나"라고 하면서 조금 씁쓸한/쓸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책 한 권 값도 안 되는 월정액으로 좋은 책을 많이 읽을 수 있다면, 아니 읽지는 않더라도 좋은 책에 대한 접근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전자책을 읽으면서 활자에 친해지다 보면, 종이책을 구매하는 경우도 생길 것이다. 가령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전자책으로 읽는다고 해보자. 재미는 있는데 읽기가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 종이책으로 사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일이 생기기를 바란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론칭 기념으로 밀리의 서재에서 몇 가지 챌린지를 한다. 첫 문장 읽기 챌린지, 완독 챌린지 등. 세계문학전집 열독률을 높이려는 아이디어겠지만, 좀 우스꽝스럽기는 하다(챌린지를 완수하면 배지도 준단다). 별의별 해괴한 챌린지(오늘 뉴스를 보니 일본에서 편의점 김밥이나 빵을 손으로 주물러 망가뜨리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는 챌린지가 유행이라고 한다)가 넘쳐 나는 세상에서, 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한 챌린지인가.


첫 문장 읽기 챌린지의 대상 도서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다. 개인적인 취향이기는 하지만, 첫 문장 읽기 챌린지의 대상 도서로 앞의 두 권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말테의 수기>는 앞의 두 권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안나 카레니나)
오늘 엄마가 죽었다.(이방인)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여기로 몰려드는데, 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여기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말테의 수기)


첫 문장은 첫사랑처럼 설렌다. 책장을 펼쳤을 때,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첫 문장을 읽다가 두 번째 문장을 좇고, 그렇게 세 번째 문장으로 넘어가 결국 책 한 권을 다 읽게 된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은 몇 번을 곱씹게 되고, 이렇게도 생각했다가 저렇게도 생각하게 된다. 마지막 권(<안나 카레니나>는 민음사 기준 총 세 권이다)까지 다 읽고 나면, 다시 돌아와서 읽어보게 되는 첫 문장이다. 책 전체의 내용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자문하면서. <이방인>의 첫 문장은 형식적으로는 "오늘 엄마가 죽었다"이자만, 실질적으로는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이다. "아니, 어쩌면 어제"가 바로 이어지면서 자칫 뻔해질 뻔한 첫 문장이 확 살아난다. 아니 그러니까 엄마가 언제 죽었다는 것인가. 아니 엄마가 언제 죽었는지도 모른단 말인가. 아, 엄마가 죽었으니 정신이 없겠지. 그럴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새 알제의 뜨거운 해변에 와 있게 된다.


첫 문장 얘기한 김에 몇 가지만 더 해보자.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데미안>(헤르만 헤세) 전체의 주제가 온전히 담겨 있다. 나 자신에 가는 길은 얼마나 멀고 험한가.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변신>(프란츠 카프카)의 첫 문장은 얼마나 기괴하고, 황당한가. 불안함, 낯섦, 기괴함으로 책 전체의 분위기를 주조한다.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 두자." 이 얼마나 개성 있고 박력 넘치는 자기소개인가. 그런데 잠깐. 이게 진짜 자기소개일까. 이 사람의 본명은 이슈메일이 아닌가. 그건 그렇고, 자기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뭔가 각오를 단단히 하라는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가. 한 번 더 소리 내어 읽어 본다.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 두자." (번역본 기준) 700쪽이 넘는 <모비딕>(허먼 멜빌)의 거친 항해는 이렇게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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