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3일 독서일기
니체의 <선악의 저편>(박찬국 옮김/아카넷)을 조금씩 읽고 있다. 대학생 시절부터 철학의 언저리를 계속 맴돌고 있는데, 요즘 니체를 읽으면서 왜 진작 니체를 진지하게 읽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를 한다. 니체를 읽으면서 계속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철학의 사용'이라는 개념이다. 나도 모르게 떠올린 '철학의 사용'이란 무슨 의미일까. 단순하게 말해서 철학을 철학 자체로 받들어 모시는 게 아니라 철학을 내 삶을 위해, 그리고 타인의 삶을 위해 사용한다는 생각일 것이다. 철학은 그동안 나를 억압해 왔다. 알고 싶은 욕망에 대책 없이 들떴고, 이해되지 않음에 속절없이 좌절했다. 나의 삶을 억압하는 것이 나에게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삶에 유용하지 않은 것이, 삶에 활력을 주지 못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직접적인 쓸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쓸모'의 측면에서 보면, 철학은 그 '쓸모'에서 가장 먼 거리에 있다. 그런데 그 '쓸모없음'이 내 삶에는 가장 유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니체를 읽으면서, '철학의 억압'이라는 저주에서 벗어나, 나를 위해, 누군가를 위해, 무엇인가를 위해 철학을 사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성숙: 어릴 때 유희하면서 가졌던 진지함을 재발견하는 것.
(<선악의 저편> 94절)
우연히 니체와 김현을 동시에 읽고 있는데, 어쩌면 우연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니체와 김현의 공통점은 자신의 생각을 얘기한다는 것이다. 이 철학자와 비평가는 생각의 결과물을 단순히 던져놓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 둘의 글을 읽다 보면, 사유의 내면 풍경을 만나게 된다. 그 풍경이 아름답거나 현란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사유의 길에서 고통스러움과 처절함이 느껴진다. 힘들어서 멈춰야 할 지점에서도 멈추지 않고, 사유를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끝까지 생각하고, 더 많이 사념하는 것이다.
김현 선생은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글에서 문학의 '쓸모없음'을 옹호하고 변호한다. 문학은 쓸모없기 때문에 사람을 억압하지 않는다. "문학은 억압 없는 쾌락을 우리에게 느끼게 해 준다. 그러면서 그것은 그것을 읽는 자에게 반성을 강요하며, 인간을 억압하는 것과 싸울 것을 요구한다." 인간은 문학을 통해 불가능한 세상을 꿈꾼다. 문학이 보여주는 불가능한 세상과 현실의 세상 간의 거리와 격차만큼 우리는 현실의 세상이 얼마나 이상과 멀리 떨어져 있는지, 그리하여 얼마나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지를 느끼게 된다. "불가능한 꿈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삶은 비천하고 추하다." 선생의 이런 언명은 삶에 대한 부정이 결코 아니다. 삶을 긍정하기 위해 우리는 삶의 추한 면을 직시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우리를 억압하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고, 그 억압에 저항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삶을 긍정할 수 있다.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은 그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고,
그래서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김현,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