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북

그들이 연대해야 할 이유

by 글쓰는 변호사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 박사(마허샬라 알리 扮)는 미국 전역에서 초청을 받아 연주회를 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그러던 중 그는 남부 지역에서 투어를 하게 된다. 돈 셜리 박사는 흑인이다. 1962년의 미국, 그것도 인종차별이 가장 심한 남부에서 흑인이 연주회를 하러 다니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초청을 받아 연주자로서 간 호텔에서 식사도 할 수 없으며, 백인 소유 저택의 화장실도 사용할 수 없고, 양복을 사러 들어 간 양복점에서는 양복을 입어볼 수도 없으며, 술을 마시러 간 바에서는 백인들에게 이유없이 폭행을 당하기도 한다. 흑인 통행금지 시간에 걸려 경찰서 유치장에 끌려가기도 하고, 공중목욕탕에서 동성애를 나눴다는 죄목으로 수갑을 차기도 한다. 돈 셜리는 성공한 피아니스트로서 사회적으로는 부와 명예를 거머 쥐었다. 그러나 1960년대의 미국에서 그는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한다. 마허샬라 알리는 억압과 배제와 차별에서 오는 고통과 슬픔을 정확하게 표현해 낸다. 그의 눈빛은 깊고, 그의 눈길은 아득하다.


나이트클럽의 휴업으로 일자리를 잃은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 扮)는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이탈리아 이민자다. 토니는 자신의 집에 일하러 온 흑인들이 물을 마신 컵에 무슨 병균이라도 묻은 양 조심스럽게 집어서 쓰레기통에 버린다. 그렇기는 하지만, 당장 가족의 생계 앞에서 인종 따위가 무슨 대수인가. 토니는 돈 셜리 박사의 기사로 고용되어 남부 연주회 투어에 따라 나선다. 그의 일은 연주회에 늦지 않게 일정에 맞춰 돈 셜리를 연주회장에 데려다 주는 것. 말은 거칠고, 때로 폭력도 불사하며, 허풍이 가득하여 별명도 '떠버리 토니'이지만, 그는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마피아의 일자리 제안을 잠깐의 고민 후에 거절하기도 하고, 달리는 차 안에서 닭뼈는 무단투기할지언정 플라스틱 컵은 버렸다가도 다시 주을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어쩌면 평균 이상의 윤리적 감각을 소유한 매력적인 사람이다. 그는 담배를 무척 맛깔나게 피우고, 치킨을 무척 맛나게 뜯는다. 비고 모텐슨의 이탈리아식 영어는 대단히 매력적이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그린북(Greenbook)'은 흑인의 안전한 미국 남부 여행을 위한 가이드 책자다. 흑인이 투숙하더라도 안전한 숙소가 표시되어 있다. 이미 충분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돈 셜리가 위험을 무릅쓰고 미국 남부 연주회 투어를 하는 것은 그린북이 상징하고 있는 인종차별의 현실에 저항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한 흑인 예술가의 절실한 사회운동이다. 흑인 통행금지 시간에 흑인이 밖을 돌아다닌다는 이유로 체포하려는 경찰을 폭행한 토니에게 돈 셜리 박사는 폭행이 답이 아니며, 위엄(dignity)있는 행동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위엄 혹은 자존감있는 행동만이 어떤 사회적 문제에 대한 답을 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폭력보다는 고귀하고 지속성 있는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폭력은 상대에게 빌미를 제공하지만, 위엄 있는 행동은 상대를 부끄럽게 만들 수 있다. 저들이 저열하게 행동할 때, 우리는 고귀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한편 백인인 당신이 '인종차별'을 아느냐는 돈 셜리의 질타에 '나는 흑인보다 더 흑인같은 처지이다. 부자인 당신이 그걸 아느냐'는 토니의 항변(가방끈 짧은 토니의 본능적인 정치적 감각이 놀랍다)은 영화가 직접적으로 문제삼고 있지는 않은 또 다른 중요한 문제를 건드린다. 백인이라고해서 모두 같은 백인인 것은 아니다. 계급의 사다리의 맨 밑바닥에 있는 백인들은 차별받고 있는 흑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 지배계급의 교묘한 은폐로 본인들만 그 사실을 모를 뿐이다. 하층 계급의 백인들이 흑인들 차별에 앞장설 때, 상층부의 지배 계급 백인들은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을 것이다. 하층 계급의 백인들과 흑인들이 연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다. (자신의 물적 토대에 따른 계급을 망각하고 엉뚱한 정치 세력을 지지하는 행태가 안타깝다못해 어이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본다면, 이 영화 <그린북>이 백인 구원자 서사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에 쉽게 동의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영화의 마지막에 보여 준 돈 셜리와 토니 발레롱가의 포옹이 더 깊은 연대의식을 낳을 것을 기대해 보게 된다.


-커버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