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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변호사 Apr 02. 2019

이름짓기

이름을 짓는 네 가지 방법

2년 정도 다니던 법무법인을 그만 두고 지난 달 개업을 했다. 개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것저것 해야 할 것이 많았지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무실 이름을 짓는 것이었다. 개업을 준비하는 행위임에도 사업자등록이 선행되어야만 가능한 일이 많아서 우선 사업자등록을 해야 하고, 사업자 등록을 하기 위해서는 업체의 이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름이 없는 사람이 없듯이, 상호가 없는 사업체도 없다(다만 엄밀히 말하면, 법적으로 변호사는 '상인'이 아니기에 변호사 사무실의 명칭 또한 '상호'는 아니다). 너는 누구냐고 묻는 질문에 나는 누구다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이름이 필요한 것이다.


사무소의 이름을 짓는 방식(혹은 방법)에 대해서 고민해 보았다. 


① 소중한 사람(대체로 가족)의 이름을 붙이는 방식.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내 기억 속에서 찾아보니 혜진슈퍼, 선경미용실이 떠오른다. 흔한 이름이 많으니 특색없고 흔한 상호가 되지만, 어쩐지 낯익고 친근하다. 혜진이, 선경이는 초등학교 동창 중에 한명쯤 반드시 있을 법하다.


② 설립자의 이름자 중 한 글자 혹은 여러 글자를 그대로 차용하거나 조합하는 방식. 대표적으로 김앤장 법률사무소가 있겠다. 설립자인 김모 변호사의 성인 '김'과 장모 변호사의 성인 '장'을 가져와서 합한 것이다. 이름 자체로 멋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자기 이름을 건 만큼 뭔가 자부심과 당당함이 느껴지기도 한다(물론 영미권 법률사무소의 이름을 짓는 방식을 그대로 모방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③ 사무소(업체)의 지향점 또는 정체성을 나타내는 방식. 가령 '법률사무소 승소'는 소송에서 의뢰인을 위해 반드시 승소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담은 이름이고, '법률사무소 히포크라'는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의 이름을 차용한 것으로 보아 의료소송을 전문으로 하는 변호사 사무실임을 알 수 있으며, '법무법인 정평'은 정의와 평등의 가치를 지향하겠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④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쓰는 방식. 가령 '변호사 김oo 법률사무소', '변호사 이oo 법률사무소' 같은 경우이다. 성의없어 보이고, 멋스럽지는 않지만, 이름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라고 볼 수 있을 만한 변호사라면 혹은 자신의 이름을 앞으로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 변호사라면, 이런 방식의 이름짓기도 나쁘지는 않아 보인다.


내가 만든 법률사무소의 이름은 '인선'이다. 법률사무소 인선(人先). 인선은 집사람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①번 방식으로 사무소 이름을 지은 것이다. 그런데 마침 내 이름에도 '선'이 있다. 그러니 ②번 방식도 섞여 있다. 그런데 집사람 이름의 仁과 내 이름의 先을 합해 놓이니 어감이 나쁘지는 않지만, 그 자체로 어떤 의미가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仁(어질 인)을 人(사람 인)으로 바꾸어 보았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확정된 이름이 사람 인, 먼저 선, '인선人先'이 된 것이다. 


③번 방식을 따른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내가 적극적으로 "나는 사람이 먼저다라는 가치를 실현하는 법률사무소를 만들겠다"라는 의지를 담아 사무소 이름을 지은 것은 아니므로 완전히 같다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는 구차한 변명이다. 어떠한 경위로 이름을 지었건 외부로 드러나는 이름은 인선, '사람이 먼저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그러니 그 이름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자유, 평등, 정의, 인권처럼 정말 중요한 가치는 실천하기가 어렵다. 앞으로 내가 변호사로 살면서 '사람이 먼저다'라는 가치를 얼마나 실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실없는 사람으로 보일까봐, 당당하게 사무실 이름이 '인선'이고 그 뜻이 '사람이 먼저다'라고 말하는 것이 쑥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사람이 먼저다'라는 가치를 실현하지는 못하더라도 '사람이 먼저다'라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최소한 '사람이 먼저다'라는 가치를 잊지 않기만 하더라도, 이름값은 하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법률사무소 인선'의 변호사이고, 내 사무소 이름은 '人先'이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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