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을 이해하기 위하여 #002
페미니즘은 기존의 지배적 질서와 기득권 체제에 균열을 내고자 하는 운동이다. 가부장제-남성중심주의-자본주의-신자유주의 연합이 만들어 낸 폐쇄적 시스템을 전복하고자 하는 운동이다. 억압적 지배 체제에 대해 일단 거부하는 몸짓이 이 운동의 시발점이다. 이 거부하는 몸짓은 그 자체로 메시지이고, 내용을 이루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거부의 몸짓을 실어 나르는 형식이다. 지배적인 담론에서 공식적으로 통용되는 형식과 동일한 형식을 가지고 지배 체제와 싸우는 것은 전략적으로 그다지 현명하지 못하다. 힘이 다른 상황에서 같은 수단으로 싸울 수는 없다. 그럴 경우 지배 체제는 저항의 몸짓을 순치시켜 자기 질서 내로 편입시켜 버린다. 싸움에서 형식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이유다.
그래서 <웃어넘기지 않는다-페미니스트 킬조이가 보내는 쪽지(2016)>의 저자 에린 웡커는 쪽지 형식의 글을 짜깁기한다. 쪽지의 '겹쳐 붙이기'다. 쪽지는 논리적 형식을 따르지 않는다. 서론-본론-결론의 선형적 체계에 매이지 않는다. 그래서 예측 불가능하고, 기대를 벗어난다. 통념에 기초한 관습적 독서의 궤도를 이탈시킨다. 쪽지는 비선형적이고, 날렵하고, 날카롭다. 기존 질서를 단번에 붕괴시키고 전복시키지는 못하지만, 작은 상처를 낼 수는 있다. 수많은 쪽지들이 가부장제라는, 남성중심주의라는, 자본주의라는 지배 질서의 성벽에 간단없이 표창처럼 날아와 꽂힐 때, 그 작은 상처들이 모여 균열을 만들고 종국에는 붕괴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Kill Joy. 즐거움을 죽인다. 어떤 즐거움인가.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가 만들어 내는 즐거움이다. 성차별적 즐거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비하와 희화화를 통해 만들어 내는 즐거움. 모두가 즐길 수 없고, 특정 세력 또는 집단만이 즐길 수 있는 즐거움. 성희롱과 강간과 같은 성범죄를 소재로 하는 농담들. 추석과 같은 명절에 누군가는 부엌에서 음식 만들고 설거지하며 일하는 동안 편히 앉아서 그 음식을 안주삼아 술을 마시며 놀고 있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
저자는 우리에게 그리고 지배 체제에 세 개의 쪽지를 보낸다. 강간 문화에 대한 쪽지, 우정에 관한 쪽지, 페미니스트 엄마 노릇에 대한 쪽지. 남성인 나에게 두 번째 쪽지와 세 번째 쪽지는 제대로 수신되지 않는다.
두 번째 쪽지는 '여자의 적은 여자다', '여자들은 참된 우정을 가질 수 없다'와 같은 남성 중심 지배문화가 유포한 편견에 대한 것인데, 남자인 나로서는 저자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거나 반대할 경험적 근거가 전혀 없어서다. 다만 삶의 방식으로서의 '우정'에 대해서는 찬성한다.
세 번째 쪽지는 엄마가 된 페미니스트인 저자가 겪는 분열증에 대한 것으로, 글 자체도 분열증의 징후를 가감 없이 드러내 보인다. '엄마'라는 존재(또는 '엄마 노릇')가 사회적으로 만들어지고 강요되는 것인지 아니면 생물학적으로 또 본능적으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인지, 이 둘 사이에서 저자의 내면 또한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이 흔들림은 그 자체로 적지 않은 의미가 있는데, 모성이 조작된 신화라면, 우리는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에게 자행되어 온 억압을 해체할 수 있는 동시에 모성이라는 억압적 신화를 스스로 내면화된 여성들이 스스로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쪽지, 강간 문화에 대한 쪽지만이 나에게 간신히 도달된다. 저자는 남성 중심-가부장 사회에서 강간을 다루는 방식을 문제 삼는다. 강간이 있을 수 있는 일, 용인될 수 있는 일로 인식된다는 점이 문제라는 것이다. 여성들은 밤길을 조심해야 한다, 어두운 곳에 혼자 가면 안 된다, 다리를 벌리고 앉으면 안 된다, 야한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와 같은 말들은 강간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인식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강간 문화에서는 여성과 남성 모두 성폭력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실제 강간이 발생했을 때, 주류 사회는 강간을 예외적인 일로, 강간범을 끔찍한 괴물(반사회적 예외적 인물)로 그린다. 이렇게 함으로써 강간이라는 범죄는 주류 사회의 질서 바깥으로 배치되고, 지배 체제는 아무런 결함 없이 편안하게 유지된다. "강간범을 그가 침범하는 문화 바깥에 놓으면, 강간범은 가부장 문화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이례적 현상으로 남는다."
주류 사회가 만들어 유포하는 강간 내러티브의 한 축을 '강간은 예외적인 일이고, 강간범은 괴물이다'라는 명제가 담당하고 있다면, 다른 한 축은 피해자에 대한 공격이다. 강간 사건이 발생하면, 피해자는 도마 위에 오르게 된다. 경찰에서 피해 사실에 대해 진술한다. 병원에 가서 증거를 채취당한다. 검찰에서 다시 피해 사실에 대해 진술한다. 가해자는 합의를 요구한다. 법원에서 피고인의 변호인은 피해자를 쓰레기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왜 이렇게 신고가 늦었나요. 왜 즉시 신고를 하지 않았나요. 가해자와 이런 내용의 카톡을 주고받은 게 사실인가요. 가해자를 보고 왜 웃었나요. (변호사로서 나도 이와 같은 강간 내러티브를 유포하고 강화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그러나 피고인이 행사할 수 있는 헌법 및 형사법상 권리 또한 결코 가볍게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대법원의 소위 '성인지 감수성' 이론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이유다. 무고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비평가인 사라 아메드는 이렇게 말한다. "행복하다는 것은 가부장제,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인종차별주의와 같은 지배적인 신념 체계와 동일한 견해를 밝히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 아무런 문제 없이 행복하다면, 당신은 세속적으로 아주 성공한 사람이거나 반성을 모르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당신이 지금 행복하지만, 그 행복이 뭔가 조금 거슬리고 찜찜하다면, 설사 분열증을 겪게 된다고 하더라도 지배 체제의 성벽에 꽂아 놓을 날카로운 쪽지를 써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