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대자보 그리고 뮤지컬 <카바레>, 책 <어느 독일인 이야기>
나는 초등학교 빼고는 학교를 선택해서 진학했다.
중학교 진학으로 얻은 교훈은, 본인 소신은 없는데 친구 따라가면 망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명확히 하고, 그 목표에 따른 선택을 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중학교 진학과 학교 생활을 통해 깨달은 바가 있어서, 고등학교는 입시 전략적으로 유리하면서도 학교 분위기는 여유가 느껴지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진학 1년 전부터 목표를 세운 뒤에 실행했다.
고등학교에 다니며 내가 생각하기에는 미래에 어떤 직업을 선택하든 도움이 될 수 있는 학문은 경영학 같았다. 경영학과가 있는 대학 중에서도 학과가 활발하게, 잘 운영되기로 유명한 곳으로 가길 원했다. '잘 운영되는지 여부'는 학과 사이트에 소개되어 있는 학생들의 활동 사항, 교육 프로그램, 국내외 다양한 인증상황을 참고했다. 여러 정보를 조합해서 진학 원서를 제출했고, 문자 그대로 다사다난한 수험생활을 거쳤다.
운이 좋게도 가장 진학하고 싶었던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에 진학했다.
3월 입학을 앞둔 채, 1월부터 다양한 신입생 환영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었다. 메일과 기타 sns를 통한 정보 공유도 활발했다. 역시, '잘 운영되는 곳'을 선택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이런저런 프로그램에 최대한 참여했다. 그중 한 가지, 가장 많은 학생들이 참여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는데, 정말 기억에 남는다. 유익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나 혼자 붕 떠 있는 느낌이 들어 기억에 남았다.
그 오리엔테이션(이하, OT) 전까지 나는 고려대학교의 정보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정말 없다시피 했다.
장학제도가 얼마만큼 활성화되어 있는지, 학생들의 편의시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등 내가 원하는 정보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OT는 내가 상상하던 여느 ‘팬클럽 모임’과 같은 분위기였다. 행사를 진행해 주시는 교수님께서 학교에 관한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시면, 참가한 신입생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외쳤다. 색이 빨간색인지 크림슨인지, 개교연도는 언제인지, 응원단 이름은 무엇이며 응원가는 무엇 무엇이 유명한지, 대대로 내려오는 학교 및 학과 전통이 무엇인지. 나만 모르는 느낌이 들 정도로 우렁찬 군중의 소리로 쩌렁쩌렁 울렸다.
마치 내가 영화 <트루먼 쇼> 이야기 속에 '트루먼'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나 빼고 모두가 답을 아는 퀴즈를 OT 내내 듣는 기분이란 신기하고 묘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게임에 처음 진입한 뉴비(처음 이용하는 사람)처럼, 학교 생활을 겪어가며 익혔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었다. 학교 상징색은 핏빛 크림슨이고, 골을 넣거나 경기 흐름상 승기를 잡았을 땐 응원가로 뱃노래를 부르고, 매년 4월 18일이 되면 학교에서 4.19. 민주묘지까지 구국대장정을 한다는 것, 겉으로 볼 때는 재미로 연세대와 대결구도를 펼치지만 사실 티격태격하면서 서로 즐거이 어울리는 분위기라는 것.
연세대와의 대결구도 외에는 어느 것 하나 진학 전에 알던 것이 없었다. 차츰 알아갔던 문화 요소마다 나는 하나하나 사랑에 빠졌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문화요소 중에서도 우리 학교 특성이 잘 드러나며, 내가 정말 좋아하던 한 가지 문화가 바로 대자보였다. 교내에서 또는 사회적으로 이야기 나눌 만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학교 곳곳에 동아리가, 학과가 또는 개인이 꾹꾹 눌러쓴 대자보가 붙었다.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고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는 문화가 좋았다. 학교 내에서 가장 대자보가 많이 붙던 곳은 '정경대 후문'이라고 부르는, 식당가로 향하는 언덕에 있는 길이었다.
'정경대후문'이란? 캠퍼스가 넓어 학교로 들어가는 문이 여럿 나 있었는데, 그 문마다 특징을 따서 부르곤 했다. 지금 언급하는 공간은 당시 '정치경제학부'건물의 후문에서 나오면 바로 연결되는 길이었다. 그래서 '정경대 후문'이라고 하면, 학교교문 중 한 곳으로 이어지는 그 길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정경대 후문 길’에는 또 다른 이름도 있었다. 야트막한 언덕이 있어 계절에 관계없이 항상 바람이 강하게 불곤 해서, 학우들은 ‘바람의 언덕’이라고 불렀다.
바람의 언덕 봉우리부터 언덕 가장 아래인 정경대 후문까지, 그리고 반대편 울타리에서부터 후문까지 양쪽 모두 울타리 벽에 가로로 길게 게시판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게시판 공간이 모자랄 정도로 '할 말 많은 사건'이 벌어진 경우에는 정경대 건물 뒤쪽 벽면, 그것도 모자라면 길바닥에도 대자보가 붙었다. 그럴 때면, 마치 바람의 언덕이 종이로 도배된 것 같은 모습이 되었다. 학생들과 교수님들은 길에 붙은 대자보를 조금이라도 덜 밟으려고 신경 써 걸었고, 눈길이 가는 문장에 뒷걸음질 쳐 가만히 서서 읽기도 했다. 식당가로 향하는 길이라 항상 붐볐지만, 대자보를 읽는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아 불편하다던가, 길 비키라고 싸움이 난다던가 하는 일은 한 번도 못 봤다. 그런 분위기도 좋았다.
오가는 학생들은 책이나 음료를 들고, 또는 가방을 고쳐 메고 가만히 서서 대자보들을 읽었다. 함께 걷던 무리이거나 처음 만난 사람들이더라도 대자보의 내용에 대해서 토론하기도 했다. 이렇게나 불안정한 사회에서, 정의롭지 않은 사회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고민했다.
대학시절 내내 대자보가 한 장이라도 붙어 있는 것이 일상이었다. 한 번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안녕하지 못합니다.”라는 내용의 대자보가 붙어 많은 학우들의 공감을 얻었다. 학교 외부로도 그 메시지가 퍼져나가 사회적으로 어떤 물결을 퍼뜨리기도 했다.
대학에서 공부한 지식뿐만 아니라 사회 돌아가는 양상에 관심을 갖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고 작게나마 실행에 옮기는 사회참여적인 태도도 대학 문화를 통해 내재화한 내 성향이자 특성이다.
2024년 12월 연말, 한 달 만에 정말 여러 사건이 발생했다. 국가 상황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시간이나 경제력을 보태거나 직접 참여하는 국민들의 모습을 보며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희망도 갖게 되었다.
많은 국민의 움직임과 반대로, 국가적 이슈에 대해서 뒷짐 지고 관심을 갖지 않는 인물들의 말로를 그린 이야기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뮤지컬 <카바레> 그리고 책 <어느 독일인 이야기>
우선, 뮤지컬 카바레에서 여주인공 샐리는 카바레 가수다.
그녀가 일하는 카바레 '킷캣클럽'에 들어서면 대체 어디에서 온 건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불분명한 사회자가 맞이한다.
"걱정거리는 다 클럽 밖으로 던져버리라, 밖은 얼어붙을 것처럼 춥지만 이 안은 다르다. 이 클럽 안에서는 인생도 당신도 우리도 모두 아름답다. 오늘 생각하던 그 골칫거리는 이 쇼를 보다 보면 다 잊게 될 거다."
극 중 등장하는 나치당원도 말한다.
“친구사이에 정치 얘긴 그만하자고. 당신과 나는 친구잖아. 그게 중요하지. 안 그런가? “
또 다른 책 <어느 독일인 이야기>는 한 여성에 대한 인터뷰 내용을 담은 책이다. 이 여성은 제국주의 나치 집권시기에 당의 비서로 일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히틀러가 생을 마감한 바로 그 벙커에 남아있던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인터뷰 중에 이 여성은 거듭 말했다고 한다.
‘나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그저 돈을 벌고 싶었고, 일을 하고 싶었고, 데이트도 하고 싶었고....’
그러나, 그 후에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현재 살아가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나치당은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전쟁을 일으킴과 동시에 학살을 했다. 수도인 베를린까지 전쟁을 몰고 와, 나치집권기의 수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지금까지도 오랜 시간 자국의 역사를 돌아보며 반성한다. 물론, 최근 다시 위험한 사고방식을 내세우는 정치 움직임이 있다고는 한다.
하지만, 독일에서도 다른 어느 국가에서라도 과거의 끔찍한 역사가 되풀이되지는 않을 거라는 희망을 갖는다. 현시대에서 계엄과 계엄해제가 모두 진행되었던 하룻밤을 뜬눈으로 보내며 갖게 된 희망이다. 옳지 않은 움직임을 막으려는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고 함께 행동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나오는 희망이다.
일상적인 당파 다툼이었다면 모르겠지만, 계엄과 해제와 탄핵. 권한 최고 책임자의 부재로 인한 국가 불안정성과 그로 인한 환율하락, 주가하락 등 큼직한 영향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이어지고 있다.
마음 아픈 항공사고로 인한 국가 애도기간으로 24년 연말에서 25년 연초로 넘어왔다.
주적 국가가 참전하는 바람에 좀 더 관련국에 가까워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전쟁도 아직 진행 중이다.
영화 <1987>을 보면, 히어로 영화 속 영웅 캐릭터처럼 특출 나게 강하고 모든 문제를 힘으로 밀어붙여 해결하는 인물은 단 한 명도 없다. <방구석 1열>이라는 영화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 나눌 때, 한 게스트출연자가 다음과 같은 의견을 말했다.
“각자가 저마다의 자리에서 무언가를 하려고 노력한 평범한 사람들”
다행이다. 어떻게든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게 목소리를 내거나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통의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많아서 다행이다.
사회를 뒤흔드는 일들에 대해서 ‘내 알바가 아니다.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보다도 문제 해결을 위해 저마다의 위치에서 뭔가를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다행이다. 그리고,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