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베↓리↓스↑무↓디 한 잔 주세요"
첫 유럽 여행 때의 일이다.
스페인의 어느 도시였는데, 알함브라 궁전이 있던 그라나다에서의 일인지 가우디 투어를 돌던 바르셀로나에서의 일인지는 어느덧 가물가물해져 간다. 주황빛 태양과 오렌지가 주렁주렁 열린 나무들만 어렴풋이 기억 날 뿐이다. 모든 스페인의 도시는 주황빛 태양이 작렬하고 오렌지 나무들로 가득하다..! 고로, 어느 곳에서의 일이었는지는 단단히 까먹어 버렸다.
수능 직후에 떠난 첫 여행이었기에 누구보다 들떴던 나와 내 친구는 쫑알쫑알 입을 쉬지 않고 놀리며 스페인의 골목 골목을 누볐다. 난 나름 영어전공자이며 (지금 생각하면 이게 무슨 관련인진 모르겠다만) , 고등학교 3년 내내 방송부를 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 하나로 난 사투리를 전혀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여행을 다니며 마그넷을 모으던 취미가 있던 나는 마그넷 가게를 찾기 위해 친구와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참이었다.
"야, 이거는 별로 안 이쁘제?"
"아까께 더 낫다 아이가?"
"아 맞나?"
그 순간, 앞서가던 한국인 무리의 한 남자가 뒤를 돌아보곤 이렇게 외쳤다.
"경상도에서 오셨나봐요?"
"사투리가 구수하시네요!"
평소와 별 다를 바 없던 우리의 대화가 스페인의 어느 골목에서는 참 평범하지 않은 대화였나보다. 순간 예상하지 못했던 팩트폭행에 볼이 발그레해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19년을 내리 대구에서 산 우리는 어쩔 수 없는 경상도 사람이라는 것을. 끝없이 오르락 내리락을 거듭하는 우리의 악센트와 남들과 다른 우리의 어미(語尾)는 확연히 티가 났던 것이다. 아니, 티가 날 수 밖에 없었다.
타파스와 스페인의 와인 한 잔을 곁들인 저녁 식사 내내 우린 그 이야기로 깔깔 거렸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진 않는다며.
그렇다고 나의 악센트가 부끄럽진 않다. 어쩌면 나의 멋진 아이덴티티 중 하나일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그 날 이후로 난 어디에 가서도 "전 사투리 안 쓰는 편이에요" 라는 쓸데 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블루베리스무디"를 누구보다 찰지게 발음 할 수 있다며 모두에게 시범을 보여주는 편이 되었달까.
다시 스페인의 작은 카페에 앉아서 블→루↑베↓리↓스↑무↓디 한 잔을 주문할 수 있는 그 날이 오기를..! 그 땐 사투리가 구수하다는 어느 한국인 여행자의 말에도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인사할 수 있을 것만 같다 :) 내가 쓰는 말은 모조리 표준어라고 생각하던 멋 모르던 여고생 티는 어느 정도 벗게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