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에게 자주 묻기도 하고 그 답은 매번 바뀌기도 했던 질문이다. 나는 대체로 가까운 사람들 때문에 행복해하고 동시에 가장 고통스러워하기도 한다. 그리고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에는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온전히 그 감정과 기분에 푹 빠지곤 한다. 다시는 괴로움이나 아픔이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는 기대를 하지 않으면 넘치는 기쁨도 고난도 없을 거라 했다)
그런 나의 모습은 꼭 어린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령 부모님과 놀러온 바닷가에 놀러온 초등학생 아이들을 보면 아침부터 초저녁까지 일정하게 높은 데시벨로 깔깔거리며 물놀이에 몰입한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몸에 튀는 물 한방울의 '웃김'도 놓치지 않고 온 몸을 흔들며 웃어댄다.
그리고 그런 어린 아이들을 보며 행복한 순간 내 마음 속에 펼쳐진 꽃밭과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반짝이는 갈색의 살빛이 좋다고 뜨거운 햇볕을 아무런 보호막(선스크린) 없이 쬐고 있으면 미처 대비를 하지 못했던 나의 피부는 일광화상을 입고 만다. 자외선이 피부에 직접 침투되서일 수도 있고 애초에 자신의 멜라닌 색소의 생성량이 적어도 일광화상을 입을 수 있다. 이렇듯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도 최소한의 보호 장치 없이(선크림을 바르지 않음), 혹은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경우에(멜라닌 색소 생성량이 적은 경우-피부가 원래 하얀 경우) 생각지도 못한 염증 반응(일광 화상)으로 고생하게 될 수가 있다.
피부의 화상도 치유되는데 적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이 걸리는데 마음의 화상이야 말로할 수 있겠는가.
잔잔하기만 했던 마음에 난기류가 형성될 때는 불안하고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 '이 비행기가 목적지에 제대로 도착할 수 있을까?' '여기서 추락하는 건 아닐까?' '내가 비상 탈출 방법을 온전히 숙지했던가?' 등등.. 온갖 알 수 없는 뒤숭숭한 목소리가 내 머릿 속에서 시끄럽게 울린다. 심한 경우엔 이런 경험들로 공황 장애가 생기기도 한다.
비행기를 자주 타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난기류에 비행기가 추락하는 경우는 전체 비행기가 사고로 추락할 확률 0.000025%에서도 0에 가깝다는 것을. 우리도 잘 판단해야 한다. 지금 나를 흔드는 힘이 단순히 난기류일 뿐인 것인지, 아니면 탈출 시뮬레이션을 재빨리 떠올려서 진짜 탈출을 해야할 순간인지.
하지만 같은 일이라 할지라도 그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다 다르게 다가온다. 게으름뱅이에게는 공부가 고역이고, 술주정뱅이에게는 금주가 고문이다. 음욕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수수한 삶이 형벌이고 허약하고 태만한 사람에게는 훈련이 고통스러운 일이다. 즉, 모든 일은 그 자체로 괴롭거나 힘들지 않다. 곧은 노도 물 안에서는 굽어져 보이듯이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는 사실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도 중요하다.
죽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맞이하게 될 순간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죽음은 영원히 잠을 자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삶에서 잠을 자는 순간만큼 편안한 순간이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죽음도 두려울 것이 없다. 내가 겪는 불행을 너무 큰 불행이 아닌 것으로 여기려면 매 순간 다가오는 죽음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발을 헛디뎌서 아주 작은 핀에 찔렸을 때도 즉시 "그래 이것이 죽음의 모습일 수도 있었어"라고 되새기는 것이다. 만약 오늘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면 무엇이 중헌가. 한낱 작은 일로 마음을 졸이고 신경쓰며 이 남은 시간을 보낼 수는 없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순간을 유쾌하게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불행도 인간의 한 요소이다.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은 불행의 부재일 뿐이다.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싶으면 그의 반댓값도 치러야 한다. 바로 정신의 둔화와 육체의 마비다. 그걸 원하는게 아니라면 잠깐의 불행을 마주하는걸 두려워하지 말자.
결국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을 똑바로 바라보고, 주어진 삶을 흠뻑 사랑하며 행복의 순간도 불행의 순간도 인생의 한 요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은 그 자체로 괴롭거나 힘들지 않으며 오직 나 자신의 판단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즉 행복은 나 자신에게 달렸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