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채색 인간에서 유채색 인간으로
며 칠 전 엄마의 생신 선물을 사러 백화점에 갔다.
꽤 오랜 세월 동안 (질리지도 않는지) 골프에 푹 빠져있는 엄마를 생각하며 골프 브랜드가 모여있는 층으로 갔다. 나는 골프를 잘 몰라서 한 층 절반에 즐비한 매장들을 보아도 어디가 인기 있는 브랜드인지, 평판은 어떤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쓱 봤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곳에 들어갔다.
여기서 말하는 '가장 눈에 띄는'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다름 아닌 '눈길을 사로잡는 색의 옷들이 있는 전반적으로 밝은 느낌의 매장'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고른 선물은 보자마자 영혼까지 환해질 것 같은, 아주 밝은 레몬색의 얇은 바람막이였다.
나조차도 내가 입을 옷으로 골라본 적 없는, 아주 파격적인 색상이었다.
이 포지타노에서 온 것 같은 상큼한 레몬색이 주는 힘은 강렬했다. 엄마의 반응은 보지도 않은 채 당연히 좋아할 거라는 근거 없는 기대에 가득 찼고, 이때까지의 엄마 선물 중에서 가장 잘 골랐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상하다. 갑자기 기분이 왜 이렇게 좋은 거지?
드레스룸으로 가서 내가 가진 옷들을 쭈욱 살펴보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뉴트럴 톤, 튀지 않는 무채색을 좋아했던 것 같았는데 생각과는 달리 내 옷장은 알록달록한 색으로 가득했다. 심지어 등산객들의 영원한 사랑과도 같은 채도가 최대치에 있는 듯한 빨간 패딩도 있었다.
나도 모르게 일상 속에서 컬러 테라피를 하며 살았던 걸까? 순간 머릿속에서 화려한 장신구와 꽃무늬가 가득한 옷을 입은 아주머니들이 떠올랐다. 어릴 땐 그저 '왜 저런 촌스러운 걸 좋아하는 걸까?' 싶었다.
그런데 이제 알겠다.
인간은 나이가 들면서 스스로 생산하는 에너지가 줄어든다. 그래서 모자라는 에너지를 어디에선가 공급받아야 하는데 그 방법엔 수면, 운동, 건강한 음식 섭취 등이 있다. 그리고 그만큼의 힘을 주진 않지만 즉각적으로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이 바로 '색(色)'이다. 실제로 노란색은 뇌에서 행복함을 유발하는 '세로토닌'의 분비를 촉진시킨다고 한다. 또 비슷하게 에너지와 의욕을 증가시키는 '도파민'은 초록색과 파란색에서 얻을 수 있다.
단지 기분 탓이 아니었다. 색은 호르몬을 분비시키고 조절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이에 더 크게 영향을 받는 이유는, 사소한 것에서도 여러 가지 감정을 쉽게 느끼는 아이들과 달리 새롭고 신기한 것에 무뎌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내가 느끼는 이 기분 좋음은 아이들이나 동물들을 봤을 때 더러워진 나의 영혼이 순수함으로 깨끗하게 씻기는 듯한 느낌과 비슷하다. 언제는 좋고 언제는 싫은 게 아닌, 절대적인 행복감.
이런 이유 외에도, 밝은 옷은 신체가 노화하면서 생기는 주름과 어두워진 낯빛을 가려주는 효과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을 때 조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같다. 실제로 조명이 좋은 곳이나 빛이 쨍쨍한 곳에서 찍은 사진은 그 어떠한 후보정도 필요치 않은 훌륭한 사진이 된다. 프레임 밖을 나와 실제에서 봤을 때 조명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밝은 색의 옷이다. 여기에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톤의 색까지 더해진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밝고 쨍한 색을 선호하는 생물학적이고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대략 70세 이상이 되면 색을 구별하는 시력이 현저히 저하된다고 한다. 특히나 채도가 낮은 파스텔톤의 색에서는 노란색이 하얀색처럼 보이기도 하고 파란색, 초록색, 보라색 중에서 노란기가 빠진 쿨한 색들은 회색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리고 깊이(depth)를 판단하는 능력도 저하되기 때문에 건축가들은 노인들이 사는 집을 설계하면서 방과 방을 구조할 때에 이런 깊이감에 신경을 쓰고, 인테리어에 있어서는 문이나 스위치가 잘 보이도록 벽과 대조되는 색으로 칠한다고 한다. 그래서 대비가 분명한 쨍한 색상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본능적인 이끌림인 것이다.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어떤 때에는 음악이 그랬고, 또 어떤 때는 향기가 그랬다. 요즘 나의 기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 중 하나는 '색'이다.
오늘은 비가 와서 흐린 날이었다. 소제목으로 유채색 인간이라고 적은 것처럼 오늘 나의 옷은 이러했다. 기분을 끌어올리려는 나의 무의식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