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밝았다고 할 수 없었다. 전날 7시에 잤기에 30일 새벽 00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눈을 뜬 시간이 이렇다 보니 밖으로 나가기도 애매하고 아침이 밝을 때까지 요즘 빠져있는 넷플릭스 드라마나 실컷 보기로 했다. 아토차역 앞에서 일출을 보고 싶었으나 태양과의 눈치게임에 실패해버렸다. 이미 해가 떠서 하늘이 밝은 것을 본 후에야 늦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어차피 오늘은 하루 종일 프라도 미술관에 있을 예정이었기에 서두를 필요 없이 9시 반에 숙소를 빠져나왔다.
티켓박스 오픈 시간이 10시 정각임에도 불구하고 티켓을 구매하려는 사람들이 이미 긴 줄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이미 티켓을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구매한 상태였기 때문에 딱히 기다릴 필요는 없었으나 문제는, 도통 어디가 입구인지 몰랐기 때문에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그러다 안내원이 보이길래 그에게 인터넷으로 표를 구매했다고 말하며 표를 보여줬더니 곧장 2층으로 올라가서 기다라며 안내해주었다. (프라도 미술관 디렉트 입장권 구입은 klook, trip adviser, get your guide, tiquets에서 구입할 수 있다. 구글에 검색을 해보면 각 사이트마다 가격이 다른 것을 확인 할 수있다. 잘 비교하여 구입하길 바란다.) 티켓을 구매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줄이 꽤 길었는데 그들의 앞을 지나치며 2층으로 천천히 걸어 올라가다 보니마치 내가 특권을 가진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2019.10.30
프라도 미술관! 과연, 듣던 데로 작품이 참 많았다. 나는 성경과 관련된 미술 작품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몇몇 전시관은 빨리빨리 훑듯 지나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관 내에서 5시간이나 머물러있었다. 하루를 통으로 써서 미술관 관람을 하게 되다니...! 설마 했는데 정말 이렇게 긴 시간이 걸리다니...! 전시장 내 곳곳에 벤치나 긴 의자가설치되어있는데 워낙 미술관이 크고 넓다 보니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들이 걸어 다니다가 앉아서 쉴 수 있도록 배려한 세심함이었다. 나도 한 번씩 의자에 앉아서 근처에 걸려있는 작품을 감상하기도 했지만 한 번은 너무 지쳐서 카페테리아에서 탄산수를 구입해 그곳에서 20분 정도 앉아 있기도 했다. 그 결과, 이 날 휴대폰 만보기의 숫자는 미술관내에서만 2만 보가 거뜬히 넘겨져 있었다. 볼 작품이 이렇게 많은 박물관은 처음이라 힘들기도 했지만 그만큼 보람찬 하루였다.
어느 의자에 앉아서 아주 살짝, 찍어본 이 사진이 관내에서 찍은 처음이자 마지막 사진., 마드리드, 2019.10.30
언제 이런 작품들을 볼 수 있을까 싶어 미술관 지도과 펜을 들고 다니면서 마치 '도장 깨기'를 하듯 정말, 모-든 구역을 다 돌아다녔다.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후회하진 않았다. 물론 여행사 가이드와 함께 관내에 유명한 작품들 위주로 콤팩트하게 보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박물관 투어를 신청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여행사를 끼고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들어오는 것을 싫어한다. 혹시나 그 작품들 중 조금이라도 오래 보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시간에 쫓겨서 빨리 지나간다던지 혹은, 가이드를 쫓아가느라 작품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그런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홀로 5시간 동안 미술관내를 돌아다니면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프란시스코 고야의 검은 그림들을 관람한 것과 내가 10대와 20대 초반을 걸치는 시간 동안 4번이나 읽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표지인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직접 보고 오랫동안 그 앞에 머물러 멍하게 작품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오디오 가이드는 그 소설에서 주인공이 언급했던, 오른쪽 아래의 고개를 숙인 개 뒤에 있는 검푸른 드레스를 입은 여자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las meninas', '시녀들'이라고만 칭하며 그림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할 뿐이었다, 영어나 스페인어로 되어있는 것은 어떨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장장 5시간의 관람 끝에 출입구로 향하면서 오디오 가이드를 반납하고 굿즈샵을 들렀다. 예전에 누군가에게서 들었던 것 같은데 프라도 미술관에 예쁜 굿즈가 많다고 들어서 미술관을 나가기 전에 구경이나 할까 해서 들러봤는데 너무 기대를 많이 했었던 걸까, 딱히 내가 봤을 때 예쁘다고 생각할만한 것이 없어서 무난한, 예술작품이 담겨있는 엽서와 책갈피 여러 개를 구입하고 미술관을 빠져나왔다.
오후의 햇살이 비추는 Paseo del prado(프라도 길)에 있는 Prado Boulevard 공원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물이 마른 분수에 앉아 담배를 물고 있던 젊은 커플을 지나 프라도 미술관 앞에 서있는 벨라스케스 동상을 지나서 멀리, 아토차역의 둥근 아치가 보일 때까지 천천히 걸어내려 갔다. 사실 이 날, 레티로 공원에도 방문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긴 시간 동안 아름다운 것을 많이 봐서 눈과 머리는 불렀지만 아침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나의 배는 꼬르륵, 배꼽시계를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 나는 그냥 배가 고프다! 이런 강한 식욕이 나를 결국 숙소로 이끌었다.
Prado Boulevard 공원의 분수, 출처 : mirador madrid
Paseo del Pardo -프라도 길-은 마드리드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다. 이 곳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Mirador Madrid라고 하는 홈페이지에서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이 길의 1km 내에서 볼 수 있는 것들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 스페인어로 되어있지만 구글 크롬을 활용하면 한국어로 번역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숙소에 짐을 두고 나는 숙소 근처에 있는 Carrefour express로 향했다. 요거트와 피스타치오, 토마토 과자와 젤리를 구입했고 마트 옆에 열려 있던 과일 가게에서 천도복숭아와 스페인에서 유명하다던 납작 복숭아를 샀다.
납작 복숭아는 단단한 게 없어서 살짝 무른 것으로 4개를 구매했는데
"아, 이게 그 맛있다던 납작 복숭아...?"
왜 아무런 맛이 나지 않는 것일까... 단맛도 신맛도 없는, 말 그대로 ‘맛이 나지 않는 복숭아’였다. 생각해보니 지금은 납작 복숭아 철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겠구나, 싶었다만 스페인에서 기대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납작 복숭아인데 너무 아쉬웠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맛이 말 그대로 무(無) 맛 일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맛이 없었다. 더 구매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 생각하며 숙소 침대 위에서, 그 아무런 맛도 나지 않는 복숭아를 그저 잘근잘근 씹을 뿐이었다. 점심이나 저녁으로 해산물 타파스를 먹고 싶어서 Mercado San Miguel(산미겔 시장)에 가볼까도 생각해봤지만 그렇게 맛있는 음식들은 세비야에서 지내면서 먹기로 했다. 마드리드 물가는 너무 비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