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서 Jun 18. 2020

25

재회



 비는 억수같이 쏟아졌다. 서귀포에서 떠나고 4시간 동안 쉬지 않고 빗속을 달렸다. 성산으로 가는 길엔 협재에서 서귀포로 가는 길보다는 내리막길이 더 많았다. 그러나 어떤 내리막길엔 앞에서 몰아 부는 거센 비바람에 자전거를 끌고 길을 걸어 내려가기도 했다. 태어나서 이렇게 강한 비바람을 맞은 적은 처음이었다. 차갑고 얇은 빗줄기가 이미 붉게 언 두 볼을 때렸다. 긴 내리막이 끝나자 바로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경사가 점점 더 가팔라졌고 나의 두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했을 때, 순간적으로 휴대폰 내비게이션을 보았다. 다음 게스트하우스까지 20km 더 남았다고 나와 있었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렸다. 잠시 비틀거리며 걷던 나는 조금 앞에 작은 정류장을 발견했다. 자전거를 끌고 가는 두 다리는 이미 내 것이 아닌 느낌이 들었다. 마치 두 다리가 스스로 움직여서 앞에 보이는 정류장으로 어떻게든 나를 끌고 가는 듯했다.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졌고 빗물은 이미 차갑고 붉게 언 양 볼을 거칠게 때렸다. 휴대폰 시계는 3시를 조금 넘긴 시간을 말하고 있었으나 차마 대낮이라 말하기도 힘든 어두운 하늘이 머리 위에 펼쳐지고 있었다. 잠시 후 나는 비탈에 위태롭게 놓여있는 정류장에 도착했다. 다행히도 양쪽 벽이 유리로 막혀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구조의 정류장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그 어떤 집도 부럽지 않았다. 나는 자전거를 최대한 정류장의 안쪽으로 붙여 세워놓았다. 그리고 나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고 옆으로 바싹 붙어 비를 피했다. 유리벽에 부딪치는 빗물 소리가 마치 딱총 소리같이 위협적이었다. 아무도 없는 길 위, 홀로 제주도의 비 오는 정류장에 있다는 것은 왠지 두려우면서도 신비로운 기분을 느끼게 했다. 딱총 같은 빗소리를 배경음악으로 나는 잠시 정류장을 액자 삼아 건너편을 쳐다보았다. 거센 비바람에도 희뿌연 물안개는 산등성이에 내려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저것은 물안개가 아니라 다만 비바람의 뭉치일지도 모른다. 겨울임에도 짙은 녹색을 띠는 산을 하얀 물안개는 짙다 못해 게 만들어 한 폭의 수묵화를 그려냈다. 순간 눈앞의 모든 것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려다 내 처지가 문득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하, 꼴이 말이 아니네.

비에 젖어 사시나무 떨듯 온 몸이 떨리고 있었다. 두 다리는 이미 충분히 해진 느낌이었다. 갈 길이 멀지만 그렇다고 돌아갈 길이 가까운 것도 아니었다.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는, 그런 상태... 대학생이 되기 전부터 나는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라는 상상을 한 적이 있었는데 막상 닥쳐보니 헛웃음만 피식피식 나오는 현실이 보였다. 마치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햄릿의 대사와 같이 어느 중대한 기로에 놓인 느낌일 거라 생각했는데... 현실은

 어우, 추워....

추위와의 싸움이라니. 게다가 배까지 고프니 있던 힘도 다 달아나 버릴 지경이다. 내가 생각했던 중대한 기로라는 건 죽음과 삶의 사이, 그보단 훨씬 가벼운 것이겠지만 어쩌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만큼은 그 무게가 달리 느껴질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부분들이었다. 고등학교 땐 대학 선택의 기로에, 대학에 들어온 지금은 앞으로 내 미래 선택의 기로에, 그리고 그 후엔 직장이며 결혼이 되겠지. 엄마는 어땠을까. 어른인 엄마가 느꼈던 인생에서 가장 무거운 무게는 뭐였을까. 나름 꽤 진지한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멀리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자전거 종소리였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빗물로 흐려진 정류장의 벽 너머로 자전거를 탄 누군가가 내가 걸어온 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정류장 안에 앉아있는 나를 보고 종을 울린 것일까. 그는 다시 한번 종을 울렸다.

 뭐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오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오르막 경사는 심했었다. 그와 정류장 사이의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지자 나는 그제야 그 사람이 왼쪽 다리를 절며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는 여전히 세차게 몰아치며 내리고 있었다. 나는 정류장에서 박차고 나가 올라온 길을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단숨에 뛰어내려 갔다. 고개를 숙이며 걸어 올라오는 그의 모습이 점점 더 가까워지자 거칠게 내리는 빗 속, 어디선가 매화향기가 피어나는 듯했다.  

 괜찮으세요?

 "고맙습니다."

그리고 그 매화향기는 상상 속의 향기가 아닌, 내가 알고 있는 향기라는 것도 깨달았다.

 어,

나는 무릎을 굽혀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려 눈을 마주치려 했다. 그의 얼굴을 덮은 검은색 복면 위로 찡그린 눈썹이 보였다.

 ...해진씨...?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를 향해 돌려진 눈은 금새 반달이 되어있었다.

 "우와, 윤겸씨?"

 이, 일단 자전거 주세요. 여기 잠시만 있어요!

나는 그의 손에서 자전거를 거의 뺏다시피 가지고 정류장까지 단숨에 올라갔다가 다시 그가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와, 어떻게 여기서 이렇게 봐요? 인사도 안 하고 그냥 가는 게 어디 있어요?"

 제 어깨 빌려요. 가서 말해요.

 "고마워요."

나는 그의 팔을 내 어깨에 걸고 그와 보폭을 맞춰 천천히 정류장까지 걸어 올라갔다.

정류장에 도착하고 그를 의자에 앉히자마자 그는 대뜸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자신이 들어야 할 질문을 내게 던지는 그에게 나 또한 되물었다.

 해진씨야말로 어떻게 된 거예요, 다리를 절고 있잖아요.

 "아, 하하 저기 내려오는 길에서 굴렀어요."

나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고 숨도 쉬지 않고 질문을 했다.

 뭐라고요? 얼마나 빠르게 내려왔길래 그래요? 가뜩이나 비도 오는데! 위험하게 왜 그랬던 거예요?

 "어, 하하하, 어휴! 숨 넘어가겠어요."

해진씨는 눈웃음을 지으며 내 입을 막았다.

 걱정이 되는데 어떻게 해요.

맘 속으로 맴돌던 말이 입 밖으로 나온 순간,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의 표정에서 물음표가 저절로 읽힌다.

 "고마워요."

그러나 내가 한 말에 나 자신이 어쩔 줄 몰라할 시간은 짧았다. 여전히 거센 빗줄기는 정류장 유리벽을 세게 때리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예요? 도대체 왜 아무런 인사도 없이 간 거예요? 그리고 왜 여기에 있는 거고?"

 그 날은 새벽 일찍 출발했었어요. 여기 있는 이유는, 보시다시피...

내 말꼬리가 흐려지자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새침하게 말했다.

 "인사는 하고 갈 줄 알았는데...! 서운했어요."

그의 말에 나는 꽤 당황했다.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아, 저.. 저는,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 헤어짐에 강한 사람이 아니에요.

앞이 보이지 않는 희뿌연 안갯속을 오로지 자전거로 내달렸다. 다리를 다쳤다.

 "헤어짐에 강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나 달려야만 했다. 목적지가 없으나 어딘가에는 도달해야 하니까. 그리고 마침내 저 멀리 정류장이 보였고 그 안에 앉아있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을 때. 그리고 그 누군가가 며칠 전 만남은 있었지만 아무런 헤어짐의 인사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진 누군가였다면,

 그리고... 그리움도, 많아요.

그리고 그 사람이 그리움도 많다고 한다면, 당신이라면 어떤 생각에 사로잡힐 것일까.

이미 내 입을 떠나버린 '그리움'이라는 단어는 그에게 마치 숙제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풀지 못한 수학 문제처럼 답답하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런 그는 내게 어떤 말을 건네려고 할까. 내 입을 떠난 그리움이라는 단어는 다만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눈이 나를 빤히 쳐다볼 뿐, 한 동안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그는 무언가를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다시 삼킨 후 시선을 떨궜다.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거나 하지 않았다. 단지 내가 느꼈던 감정과 느낌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거나 혹은 내가 그들을 떠나는 순간부터 제 시간은 그들의 것이 되고, 그들의 시간은 내 것이 된다고 생각해요. 나는 그 사람들을 알게 되고, 그들은 나를 알게 되고. 그렇게 서로의 시간을 공유하고 나누는 거죠. 협재에서 만났던 사람들... 해진씨, 사장님, 신혁씨, 모두가 그리웠어요. 오직 하루였지만 제겐 너무 큰 시간들이었어요. 그래요, 뭐, 이렇게 생각하면 나름 긍정적인 거죠. 사실 너무 어렸을 때 헤어짐이라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어쩌면 그리움이 더 큰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사라짐과 떠나는 것들에 익숙하지만 익숙할 수 없고, 그만큼 그리워할 사람도 많지만 그리워하면서 슬퍼하고 싶지 않게끔. 어쩌면, 그래요, 어쩌면 이기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어요. 그렇지만 그렇게 혼자 마무리 짓는 게 오히려 저에겐 긍정적인 거예요. 혼자서 애쓰고 있었던 거예요, 저. 마음이 힘들지 않게, 헤어짐이라 생각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리워하는 편이, 그게 낫겠다고 생각하면서요. 물론 둘 다 힘들지만.

한 동안 두 사람 사이엔 정적이 흘렀다. 다만 타닥타닥, 유리창에 부딪힌 빗소리만 사방에 울려 퍼지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만났잖아요. 이제 마냥 그리워하지 않을 수가 있게 되었네요."

 그래서 기뻐요, 정말로.

그리고 다시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있었다. 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고 정류장 밖에 보이는 풍경을 살폈다. 여전히 물안개로 번져있는 모양이었다. 옆에 앉아있는 그의 눈빛이 잠시 느껴졌지만 나는 되려 시선을 반대쪽으로 옮기곤 했다.

 "어디로 가는 중이었어요?"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성산으로 가는 길이었어요.

 "아, 그럼 같이 가요."

 이 상태로 자전거를 타겠다고요?

 "괜찮아요."

 안돼요.

 "돼요, 괜찮아요. 조금 있으면 비가 그칠 것 같으니까,..."

그가 웃었다. 두 눈은 반달이 되어있었다. 차라리 근처에 게스트하우스가 있다면 그곳까지는 조금 무리해서라도 자전거를 타고 가던지 혹은 걸어서 가서라도 하루 이틀 정도 쉬었다가 종주를 하면 모를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전거를 타겠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럼 오르막은 같이 걸어가요.

 "좋아요."

그렇게 그를, 다시는 보지 못 할 사람일 줄만 알았던 사람을 다시 길 위에서 만났다.

매거진의 이전글 2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