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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탄산수 Nov 07. 2018

사형제도와 소설 '실수하는 인간'

사형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소현 소설가의 '실수하는 인간'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다. 주인공 '석원'은 엄한 아버지와 새어머니 밑에서 폭력에 시달리고, 실수로 태어난 놈이라는 치욕스런 말을 들으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는 아버지, 새어머니를 비롯해 끔찍한 연쇄 살인을 하면서도 자신의 범죄를 '실수일 뿐이다'라고 계속해서 되뇌인다. '자신의 존재=실수'로 받아들인 석원은 다른 이들의 생명 역시 언제든 짓밟고 죽일 수 있는 존재로 바라본다.

그렇다면 석원의 범죄는 불우한 환경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을까? 오늘 아침 올라온 '사형제, 폐지 찬성'과 관련된 한겨레 기사(https://news.v.daum.net/v/20181107050603616)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범죄가 절대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무슨 헛소리를 이렇게 길게.....;;  끔직한 삶을 살아왔다고 다 살인을 저지르냐?', 내 가족을 죽이고 내 친구를 죽인 사람을 내가 내는 세금으로 입히고 먹여 살리는 걸 당신이라면 이해하겠습니까?? 사형제도는 존속되어야 합니다' (출처 : 해당 기사 댓글)


기사와 기자를 비난하는 댓글들이 쏟아졌다. 먼저 기사의 내용은 이렇다. 한겨레가 사형수 55명의 판결문을 입수해 사형수들의 범죄 유형과 삶의 궤적들을 분석했는데, 어린 시절 불우한 어린 시절(어려운 경제 형편, 가정폭력)을 보낸 피의자가 27건(미확인 23건)으로 평범한 삶을 살아온 경우(7건)보다 4배 가까이 많았다는 것이다. 기사는 범죄를 억제할 수 있는 위하 효과가 크지 않다는 재판관들의 의견과 연구 결과를 언급하며 범죄 예방을 위한 다른 노력이 필요함을 주장하며 끝난다.

사형 제도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불우하게 사는 모든 사람들이 흉악 범죄를 다 저지르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기사는 범죄자가 불우했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만의 문제로 범죄가 발생한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기사에는 실수하는 인간 속 '석원'처럼 끔찍한 환경에서 자란 피해자들의 판결문이 담겨있다.


“사망한 피고인의 부친은 생전에 피고인의 모친을 심하게 구타하는 습벽이 있었고 이를 목격하며 자라온 피고인의 성격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이는 사실”  “양부모의 친자들로부터 주워온 자식이라는 놀림을 받는 등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자라 (중략) 오로지 피해의식과 공격적 성향만이 남아 이 사건의 먼 동기가 되었다” (출처 : 정환봉 신민정, 26년 전 '사형수' 된 방화범..지금 재판 받았으면 달랐을 운명, <한겨레>, 2018.11.07)


나는 인간이란 다른 동물에 비해 이성과 의지를 가진 존재라 해도 내가 가진 환경을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이 존재하며, 이성과 의지 역시 나의 환경 속에서 배우고 길러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태어날 때부터 인간적인 대접과 사랑은 받지 못하고 그저 잘 살아가기를 강요당한 '석원'에게 보편적인 인간의 '의지'와 '이성'의 개념을 들이대는 것이 맞을까?

다음은 석원을 제대로 키우지 못한 아버지의 잘못으로 눈을 돌려보자. 그의 잘못도 맞다. 인간을 낳아서 인간만도 못하게 그를 길렀으니까.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해보자. 대체 괴물 같은 아버지는 누가 만들었는지 말이다. 석원의 아버지는 베이비부머 세대로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이 가장 극렬하게 성장하던 시기에 활동했다. '우월한 경제적 능력=가치 있는 인간'이라는 냉철한 사회 속에서 살던 그는 경제적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자 자신을 패배자로 여긴다. 그리고 분노를 가정에서 잘못 표출한다. 실제 1994년 연합뉴스 기사에도 이런 내용이 있다.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좌절되고 소외된 남편은 가정에서 아내와 자녀들을 학대.폭행하고 애써 가꾼 살림을 때려부수며 파괴적으로 그 분출구를 찾는다. (출처 : 가정의 달 특집 그늘 속의 가족...가정폭력, <연합뉴스>, 1994.05.06)


우리는 돈이 있어야 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살아갈 수 있는 각박한 현실에 시달리면서도 석원의 문제는 타자화 시킨다. 누군가는 그를 더 격렬히 배척함으로써 내 안의 상처를 숨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피의자들을 이해하려는 태도로 범죄를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다만 근본적인 문제 인식 없이 범죄자 개인만의 문제로 돌리고 쓰레기처럼 내다 버리는 1차원적 태도가 오히려 또 다른 살인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다. 

결과적으로 사형을 집행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건 죽은 범죄자가 아니라 우리다. 사형제를 대체할 방법을 찾는 과정은 (앞으로) 찾을 방법보다도 더 중요할 것이다. 범죄자의 인격,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갈 우리를 위해 괴생명체를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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