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끔 이렇게 밥 먹어요.”
우리의 방
창문 밖에서 후텁지근한 바람이 들어온다. 방 한가운데는 취향이 확실히 대비되는 속옷이 건조대 가운데를 기점으로 분리돼 널려있다. 주인 1은 햇볕이 쨍하게 드는 창문 아래서 곤히 자고 있다. 내 이름은 401호, 더 정확히 말하면 서울시 서대문구 세안로31길 5에 위치한 동화빌라 4층 복도 끝에 있는 23제곱미터 방이다.
2008년 지어진 나는 약 12명의 주인을 만났다. 나는 그들이 슬퍼 우는 날이면 최대한 내 몸을 부풀려 옆방에 울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폭신하게 감싸주었고, 주말 아침 오랜만에 늦잠 자는 그들을 위해 손으로 햇빛을 최대한 가려주기도 했다. 물론 이상한 주인들도 많았다. 평일이건 주말이건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담배를 펴대 나를 괴롭히는 인간도 있었고 자정쯤 들어와 새벽 6시면 출근하고 주말이면 외박이 잦은 무심한 주인도 있었다. 날개마다 때가 내려앉은 선풍기가 덜덜 돌아가며 주인 1 이마의 머리카락을 살살 흔든다. 10년 동안 살아보니 내 기준에서 좋은 주인은 적당히 나와 함께 해주고 또 적당히 나만의 휴식시간을 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 기준과는 정반대로 6월부터는 두 명의 주인과 생활하게 됐다. 정확히 말하면 아침 8시 반부터 오후 7시까지는 주인 1과 오후 8시 반부터 아침 8시까지는 주인 2와 함께 산다. 이런 일은 정말 처음이었다. 처음 나를 보러 온건 주인 1이었다. 삼십 대 후반처럼 보이는 그녀는 종로구에 있는 요양병원 야간 근무 전담 간호사로 일한다고 했다. 자취방인 나에게 말해줬을 리는 없고 출근 전 친구랑 전화통화를 들어보니 대충 그런 듯했다. 자취방 10년 차면 이 정도는 금방 눈치가 온다. 주인 2를 들이기 전, 주인 1은 밤 8시쯤 출근해서 아침 8시면 귀가했다. 그전 주인들과 정반대 패턴이라 나 역시 적응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밤에 혼자 지내는 것도 색다른 재미였다. 주인 1은 생활시간만 다를 뿐 나를 거쳐 간 평범한 주인들과 다를 것 없는 성향이었다. 찬장에 인스턴트 쌀밥을 쌓아두고 아주 가끔 한 번씩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고, 한쪽 벽에는 1.5L짜리 물 6병 궤짝을 쌓아 올려둔 흔한 자취생의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나에 대해 흥미가 없는 점이 이전 주인들과 가장 큰 공통점이었다. 주인 2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주인 1이 출근하고 조용해진 방에 노란 스투키 화분을 들고 조심스럽게 방에 들어선 여자, 주인 2였다. 그녀는 작은 캐리어에 든 짐을 풀고 비어있는 서랍 한쪽에 그녀의 옷을 차곡차곡 담았다. 냉장고 위에 올려둔 기초 화장품과 옷 몇 가지가 그녀의 짐 전부였다. 주인 2가 오고 나서 한쪽 벽에 생활규칙이 적힌 종이가 붙었다. 1. 월세는 절반인 25만 원씩 분담할 것, 2. 생활하기로 정해진 시간에만 집을 사용할 것, 3. 빨래는 전기세를 위해 3일에 한 번씩 함께할 것. 둘은 정해놓은 시간을 칼같이 지키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갔다. 서로는 전혀 안면이 없는, 각자의 필요에 의해 만난 이익 관계였다. 셰어하우슨가 뭔가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건가 복잡 미묘했다.
스무 살 중반 정도로 보이는 B는 직장인은 아니었다. 매일 두꺼운 책들을 파란 배낭에 넣고 묵직한 발걸음으로 나서는 것을 보면 TV에서 매일 같이 문제라고 하는 취업준비생? 비슷한 것 같았다. 20년 전 지어진 원룸이 즐비한 이 골목에서 나름 10년 차인 나는 신축에 속해서 그런지 5만원 정도 더 비싼 방인 나는 아직 취업준비생을 주인으로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주인 1을 비롯한 12명의 주인과는 조금 달랐다. 배달음식 대신 매일 작은 밥솥에 밥을 해 김과 함께 먹는 것도 차이라면 차이였지만 무엇보다 매일 나를 쓸고 닦고 깨끗하게 만들어준다는 점이 큰 차이였다. 난 그녀가 좋았다. 내게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라디오를 들려주기도 하고, 달달한 향초를 켜주기도 했으니까.
주인 1도 주인 2의 입주가 썩 만족스러운 듯했다.
“응. 그렇지 않아도 병원비 때문에 돈 못 모으는데 잘 됐지. 애가 깨끗하게 잘 생활하는 것 같아. 얼마 전에는 휴일에 빨려고 침대 밑에 넣어둔 스타킹을 다 빨아 널어뒀어.”
자기 속옷과 함께 건조대에 널어진 2의 속옷들을 보며 웃었다. 둘은 주로 주인 2에 의해 쓰인 포스트잇으로 소통했다. 주인 2는 1에게 얇은 커튼을 달아도 되느냐, 자두를 사서 씻어두었으니 꼭 먹어라, 자기 덧신을 빨며 스타킹도 함께 빨았으니 기분 나쁘셨다면 다음엔 하지 않겠다 등의 메시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5시쯤 됐을까. 쁘라삐룬이라는 태풍이 북상해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주인 1은 여전히 한밤중이었다. 그때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온몸이 비에 젖은 주인 2가 들어왔다. 방 사용시간까지 3시간 반이나 더 남은 시간이었다. 소리에 깬 주인 1은 예상치 못한 출입시간에 한번, 그녀의 행색에 한 번 더 놀랐다. 주인 2는 온몸에 물을 뚝뚝 흘리며 현관에 쭈뼛쭈뼛 서서는 주인 1에게 물었다.
“제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데 차마 갈 데가 없어서요...”
주인 1은 대답 대신 재빨리 건조대에 걸린 눅눅한 수건을 들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몸에 수건을 감싸고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을 모으고 엉엉 울기 시작하는 주인 2, 주인 1은 선뜻 말을 건네지 못하고 한 손에 각티슈를 쥔 채 그녀를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주인 2의 들썩임이 조금 잦아지자 주인 1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세상이 뜻대로 잘 되지 않죠? 저도 이 방에서 참 많이 울었는데... 울고 싶을 때 실컷 울어요.”
주인 1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주인 2는 주인 1의 말에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이렇게 비가 오는 날도 있으면 해 뜨는 날도 있더라고요. 혼자 울지 않게 둬서 다행이네.”
주인 1은 주인 2의 젖은 등을 쓰다듬었다. 주인 1은 일어서더니 찬장에서 인스턴트 미역국 팩을 뜯어 냄비에 끓이고는 전자렌지에 햇반 2개를 돌렸다. 자취방을 함께 사용하는 주인 1과 2는 작은 간이탁자에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감사합니다.”
주인 2가 말했다. 주인 1은 웃으며 말했다.
“우리 가끔 이렇게 밥 먹어요.”
주인 2가 입에 밥을 한 가득 넣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빗방울처럼 한껏 몸을 부풀려 둘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나를 거쳐 간 12명의 주인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생활 방식도, 직업도, 성격도 모두 달랐지만 비 내리는 오늘처럼 내 품에서 한 번씩은 울고 갔다. 이불을 덮고 숨 죽여 울었던 젊은 남자, 건물이 떠나가게 대성통곡 했던 여자, 콧물을 자꾸 훌쩍이던 중년의 남자까지. 그런 날이면 나는 숨 죽이고 가만히 그들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오늘은 주인 2에게 나 말고도 주인 1이 있었다. 비가 와서 좋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