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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탄산수 Jul 15. 2018

[끄적끄적 작문] 경로석과 탑골공원

혐로현상에 대하여



경로석과 탑골공원


"이 영감탱이야, 물 좀 아껴 쓰라니까. 아침마다 무슨 샤워를 이렇게 오래 하냐고!" 아내가 20분째 끊기지 않는 물소리를 듣고 화장실 밖에서 소리친다. 그는 불룩한 배를 매만지며 샤워부스에서 떨어지는 물을 맞고 서 있다. '윽, 노인 냄새.' 어제 지하철에서 옆자리 아줌마에게 들었던 치욕적인 말을 떠올리며 그가 때밀이로 온몸을 빡빡 닦아내기 시작한다. '어제도 열심히 씻었는데...' 얼마나 비벼댔는지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나니 살갗이 모두 붉게 일어나있다. 화장실에서 나온 그는 8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보며 분주하게 준비를 시작한다.

출근길에 바쁜 사람들이 잰걸음으로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그도 그 무리에 쓸려 역 안으로 천천히 들어선다. 낡은 갈색 구두, 빳빳하게 다려진 면바지, 파란 체크무늬 반팔 셔츠. 머리가 새하얀 그는 화장실 옆 전신거울 앞에서 다시 한 번 옷매무시를 점검한다. ‘면도를 더 깨끗이 할 걸 그랬나.’ 마른 얼굴을 연신 쓸어내리고는 경로우대카드를 찍고 개찰구를 통과한다. 한 계단씩 내디딜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멀리서 열차가 들어온다는 안내 방송이 들린다. 한 걸음씩 천천히 내딛는 그의 옆으로 사람들이 바쁘게 계단을 오르내린다.

그에게는 지하철을 탈 때 몇 가지 지켜야 할 원칙이 있다. 첫째, 샤워를 깨끗이 하고 향이 강한 로션을 두어 번 바를 것. 둘째, 경로석에 앉지 않을 것. 마지막 셋째, 절대 누군가를 빤히 쳐다보지 않을 것. 열차가 들어온다는 안내 방송이 들리자 그가 긴장한 듯 헛기침을 두어 번 한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선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그의 얼굴로 스친다. 후- 하고 크게 숨을 내쉰 순간 앉아있던 젊은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헤드폰을 끼고 있는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일어선다. “어이 학생, 나는 괜찮...” 남자는 이미 등을 돌리고 서 있다. 양옆에 선 사람들이 동시에 그를 쳐다본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오늘은 사람도 많은데 경로석으로 갈 걸 그랬나.’ 마지못해 그가 자리에 앉는다.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아낸다. 

그의 입장에서도 경로석에 앉는 것이 가장 편하다. 그러나 경로석에 앉아 있으면 종종 얼굴 붉어지는 일이 생긴다. 나라 돌아가는 이야기를 울분 토하듯 뱉어내는 동년배 친구들 때문이다. 언제 한번은 똑같은 상황에 맞닥뜨렸다가 젊은이들에게 ‘틀딱 꼰대들이 XX 시끄럽네.’이라며 싸잡아 욕먹은 적도 있다. 불콰하게 취해 술 냄새 풍기며 이야기하니 누가 봐도 좋아보이진 않겠다 싶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노인네들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좀 하겠다는데 그마저 꼰대 소리를 들어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 서러워 울컥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도 친구들을 적당히 말리고자 여러 가지 방법을 써보았다. 상대편의 무릎을 쓸어내리며 허허하고 웃어버려 대화를 차단하기도 하고 타자마자 조는 척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시적일 뿐이었다.

그럴 바에는 경로석 무리에서 벗어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년배 노인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는 무임승차한 지하철에서만큼은 노인들이 입을 꾹 닫고 있는 편이 여러모로 평화로운 일이라 생각했다. 지하철에 사람이 가득차도 경로석 앞에 서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 이곳에서만큼은 소외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는 오늘도 경로석에 가지 않길 잘했다 스스로를 위안한다.

‘이번 역은 무악재, 무악재역입니다.’ 하나, 둘, 셋, 넷.... 그가 손가락을 접어가며 몇 정거장이 남았는지 세어본다. 처음부터 그가 지하철을 탈 때마다 자신에게 깐깐하게 굴었던 것은 아니다. 딱 달라붙은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여학생이 그의 앞으로 선다. 예전이라면 싱그러운 젊음이 부러워 바라보았겠지만 그는 눈을 꾹 감아버린다. 지하철 한번 타는데 지켜야할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던 찰나, 갑자기 그의 오른편에 앉은 아가씨가 코를 킁킁거린다. 순간적으로 그가 몸을 웅크린다.

‘한 정거장만 더 가면 종로3가군.’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일어서 발을 내딛는 순간 열차가 덜컹댄다. 그가 중심을 잃고 옆 사람 팔뚝을 손으로 잡는다. 인상을 찌푸리는 옆 사람의 얼굴을 보며 그는 연신 손을 움직여 미안함을 표한다.

“어이!”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멀리서 그를 알아본 친구가 크게 이름을 부른다. 그들의 옆을 스치는 사람들이 미간을 찌푸리며 둘을 번갈아 바라본다. 그는 구기고 있던 가슴을 쫙 펴고는 이렇게 외친다. “어이! 밤새 안녕하셨는가!” 그들은 두 손을 마주잡고 2번 출구를 향해 걸어간다.

탑골공원 삼일문을 들어서자 구부정한 고목나무 아래 백발의 노인들이 가득하다.

“아침부터 다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시나.”

팔각정 아래에 장기알처럼 옹기종기 모여 앉은 친구들 틈으로 그가 자리를 잡는다. 어제 두 번째 열린 남북정상회담 이야기였다.

"민주당 그냥 뭐 좋지는 않아도 이번에 문재인이 잘했어. 이번 건 잘한 거야. 핵으로 싸우면 다 죽어. 김정은이가 아니라 문재인이가 잘한 거야!"

그가 목소리 높여 이야기하자 노인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거린다.

“맞어. 대학까지 나온 형씨 말은 백이면 백, 다 맞지!”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옆에서 듣고 있던 친구는 그의 말을 거든다.

“북한을 다 믿는 건 아냐…근데 뭐 어떡할 거야, 나라에서 어련히 하는 일인데 별 수 있나. 우리가 북한보다 잘사는데 공산당이 되겠어?"

눈을 번쩍이며 대화를 나누는 그의 얼굴에 밝은 생기가 돈다. 공원을 걷는 젊은 커플이 고개를 숙이고 그들 곁을 지나간다. 어디선가 오래된 막걸리 냄새가 풍겨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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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로현상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지하철 한쪽 귀퉁이에 자리잡은 경로석과 탑골공원은 노인들이 유일하게 숨쉴 수 있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젊은이들에게 소외당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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