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바이벌에서 얻는 인생 레슨

보이즈2 플래닛

by 읽고 쓰는 마음

나는 서바이벌이 좋다. 도전슈퍼모델 시리즈, 트와이스 뽑는 식스틴, 프로듀스 101, 방과 후 설렘, 스트릿파이터 시리즈, 그리고 보이즈플래닛에 이르기까지 여러 프로그램을 시청해 왔다.


서바이벌을 좋아하는 이유는 리얼하게 치열하기 때문. 간절히 바라는 바가 있어 내 모든 것을 바쳐 노력하는 것, 극한까지 몰리고 카메라 유무와 상관없이 인간의 본성이 바닥까지 드러나는 것, 그 리얼함에서 오는 감동과 치열함 끝에 주어지는 보상. 이거야말로 전채에서 후식까지 근사하게 차려낸 도파민 한정식이 아닐까.


엠넷 주최로 남자 아이돌그룹을 뽑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인 보이즈플래닛이 최근 막을 내렸다. 7월부터 9월까지 두 달간. 방송 이전부터 모였을 참가자들에게는 5개월의 여정이다. 말이 쉬워서 5개월이지 반년 가까이 얼마나 피를 말렸을까. 방송과 별개로 오래전부터 시작됐을 그들의 꿈과, 연습생으로 혹은 비인기 그룹의 멤버로 견뎌야 했던 세월까지 감안하면 평생 기다렸던 기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플을 보면서 최애가 생겨, 계정 삭제했던 엠넷플러스앱을 다시 깔고 열심히 투표까지 하면서 몇 가지 인생의 교훈을 얻었다.


#1. 전화위복. 이젠 다 망했다고 생각한 순간이 실은 도약의 발판일 수 있다. 나의 최애 허씬롱을 보자. 비장한 각오로 참가한 1차 경연부터 마음에 안 드는 청량 컨셉으로 밀리고, 지원하는 파트마다 족족 떨어져 남은 건 3초짜리 서브래퍼뿐. 울만큼 속상하지만, 밤에 혼자 숙소에서 울지언정 낮에 팀원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우는소리를 하거나 싫은 내색을 해서 분위기를 망치지 않는다. 설령 내가 안무를 잊어버렸어도 남들 동선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물러나 있다가 쌍욕까지 먹는다. 그렇다고 꿍해 있거나 하지 않고, 자기 페이스대로 연습해서 작두를 탄다. 그리고 드디어 공연 날. 어찌나 몸이 가볍게, 날듯이 춤을 추던지 혹시 내가 1.25배속으로 보고 있나를 확인해야 했다. 그렇게 직캠이 떡상을 하고 100만뷰를 찍는다. 씬롱은 다음 경연에서 간절하게 원하던 찰떡 컨셉을 맡으면서 포텐을 터트려 초반의 관심을 팬심으로 꽉 붙들었다.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첫만남을 함으로써 청량과 강렬을 둘 다 소화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고, 사람들에게 아쉬운 기대감을 심어준 덕분에 더 높이 뛰어올랐다. 지금 이 자리가 도저히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도, 화가 오히려 복으로 변할 수 있다. 지금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서 기다리면 반드시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2. 어떤 대박의 기회가 찾아와도 살리는 건 내 몫이다. 세상은 공정하지 않다. 어떤 사람에게는 좀처럼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보플에는 스크린에 얼굴 한 번 못 비춰보고 나가떨어진 연생들도 부지기수다. 초반부터 우산 서사를 받은 수혜자인 씬롱도 그전까지는 운이 좋다고 하기 어려웠다. 13살에 처음 데뷔해서 20살이 될 때까지 열심히 활동했지만 빵 터지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고, 결국 인기 멤버가 유부녀 팬과 불륜을 하면서 그룹이 와해되는 최악의 결말로 치달았다. 마지막 활로라고 생각하고 남은 멤버들과 참가한 보플 플래닛 C는 제작비 문제로 K랑 합쳐지면서 졸지에 취업 사기까지 당했다. 만약 씬롱이 어차피 난 중국에서 활동할 거니까 한국어 못 해도 된다면서 어학당에 다니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말이 안 되니까 한국인 연습생들과 케미도 못 만들고, 스크린타임도 못 받아서 수납되거나 일찌감치 탈락했겠지. 미래도 불투명한데 무슨 연습이냐며 춤 연습을 게을리했다면 어땠을까. 첫만남과 락에서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주며 데뷔 확정의 순간을 만들어내지 못했겠지. 지금까지 착하게 살지 않고 연예인병이 들어 인성질을 했다면 어땠을까. 비주얼과 실력에 빠져 입덕한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너무 착했고 지금까지도 한결같다고 광광 울면서 반드시 높은 순위로 데뷔시켜 주겠다고 맹세하는 골수팬이 되지 않았겠지. 엠넷이 씬롱에게 초반 서사와 스크린타임을 준 건 운이었지만, 그 운에 올라타서 비상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이 떳떳하게 살아온 지난날들과 부지런히 갈고닦은 실력 덕분이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분에 넘치는 기회가 찾아오면 오히려 내 몸에 불이 붙는 화를 당한다.


#3. 선함은 가장 현명하고 안전한 선택이다. 많은 사람들이 손해를 볼까 봐 전전긍긍한다. 조금이라도 얕보이면 무시하면서 이용하려 들까 봐 눈에 힘을 주고, 어금니를 꽉 물면서 센 척을 한다. 그런데 알고 보면 착한 게 가장 강하다. 내 잇속 챙기겠다고 아등바등하는 편이 오히려 손해가 된다. 자기 맘대로 안 돼도 분위기 망치지 않고 남들을 배려하거나, 모처럼 중국인 연생들이 많아 본인이 유리하진 판에서도 건우에게 리더를 양보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씬롱을 더 응원하게 됐다. 다른 연습생들도 마찬가지다. 킬파도 리더 자리도 없이 안무 창작을 도맡은 막내 동규는 힘들어도 투정을 부리기는커녕 마사토를 개인 레슨해주고 준서의 킬파를 만들면서 최선을 다한다. 결국 데뷔는 못했지만 가파르게 순위가 상승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받았다. 랩 실력이 훨씬 뛰어난데도 재현의 킬링파트를 빼앗는 대신 도와주는 태조를 보면서 어쩜 이렇게 착할까 탄성을 지르며 한 표를 줄 수밖에 없었다. 자기 실력만으로 뚜벅뚜벅 올라와 5위를 차지한 장지하오는 또 어떤가. 마스터들도 내 실력 다 인정하는데 파트 분배 얘기 좀 다시 해보자고 하는 대신 팀 분위기를 망칠까 봐 걱정하면서 작은 파트에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한다. 만약 장지하오가 콘크리트 1등 상원과 대립각을 세웠다면, 아직 멀티픽이 가능할 때 견제에 밀려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내려갔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나의 차애 리즈하오는 또 어떤가. 푸근한 인성과 유머, 조롱까지 받아주는 여유로운 성격으로 160명 중에 19위까지 올라왔다. 물론 실력도 뒷받침이 됐지만, 잘해도 주목받지 못하고 쓸려간 애들은 많으니까 결국은 착한 게 갑이다.


대망의 파이널, 씬롱의 3위 데뷔 소감을 보면서 나도 같이 울었다. 모든 게 감동이었지만 그 눈물 콧물 쏙 빠지는 상황에서도, 중국인인 자기 엄마한테마저 모국어로 말하지 않고 끝까지 한국어 100%로 밀고 나가는 프로 정신에 감동 이상의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13살 때부터 반평생을 함께 한 리즈하오의 뜨거운 응원과 작별. 세미파이널에서 본인이 탈락할 때도 호쾌하게 웃던 리즈하오가 씬롱이 3위에 호명되는 순간부터 소감을 말하는 내내 손을 떨면서 오열하는 건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난다.


역시 이런 날것의 진한 감동이 있어서 서바이벌을 끊을 수가 없다. 이제 나는 엠넷플러스앱을 지우고 내 일상의 서바이벌로 돌아가지만, 그들이 새 서바이벌을 론칭하면 지독한 놈들이라고 욕을 하면서도 다시 투표를 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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