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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e Aug 06. 2023

베네치아의 그 커플. 몰래 사진 찍길 잘했다.

[기록을 기록하기]내가 좋아하는 일들의 공통점





1.

저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합니다. 가이드 일과 글쓰기만큼이나 제 삶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존재거든요. 얼마 전 베네치아에 다녀왔다고 얘기를 했었지요. 오늘은 그때 찍었던 사진 한 장에서 시작된 이야기 그리고 거기서 뻗어나간 작은 단상에 대해 써보려고 합니다.


베네치아에서의 마지막 날이었어요. 베네치아의 석양을 보고 싶다며 친구들과 서쪽 방향 하늘만 바라보며 무작정 걷던 중 그날의 석양보다 아름답고 이 로맨틱한 도시보다 더 로맨틱한 순간을 목격했지요. 석양이 내려앉는 운하에 걸터앉아 서로를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두 사람의 모습이었어요.



망설일 시간이 없었습니다. 셔터를 눌렀어요. 이 순간을 그냥 흘러가게 두고 싶지 않았죠. 내가 당사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꼭 붙잡아 두고 싶은 한 폭의 그림이었어요. 그렇게 두 사람의 모습을 수십 장쯤 찍었을까요. 용기를 내서 그들에게 갔습니다.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사진을 찍었노라고. 사진이 마음에 든다면 메일로 전송해주고 싶고 혹시라도 내가 사진을 찍은 게 싫다면 지우겠다고요.


선한 인상이 꼭 닮은 두 사람은 사진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어요. 물어봐줘서 고맙다고, 사진은 지우지 않아도 되니 대신 자신들에게도 보내줄 수 있겠냐 물었죠. 저는 기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그들의 이메일 주소를 받아왔어요.


약속한 사진을 보낸 건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 한 달이 거의 지나서였습니다. 사진이 늦어져 미안하다고, 이 사진들이 두 사람의 여행의 기억을 조금 더 특별하게 만들어주면 좋겠다는 짧은 메시지와 함께 메일을 보냈어요. 며칠 뒤 답장이 도착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안젤리나. 그녀는 놀라운 얘기를 들려줬어요. 그날 저녁은 두 사람에게 특별했던 순간이었다고, 사실 제가 떠나고 몇 분 뒤 남자친구가 그녀에게 청혼을 했었다고요.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나가는 여정의 가장 아름답고 특별할 순간 중 하나를 제가 목격한 셈이죠.



아마도 그녀의 남자친구는 그날 온종일 언제 반지를 꺼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었겠지요. 석양이 구름결을 따라 붉게 퍼지던 저녁은 로맨스가 필수조건인 프러포즈를 하기에 더없이 좋은 순간이었을 거예요. 실제로 프레임 안의 두 사람은 영화의 한 장면 같았고요. 서로를 향한 그 시선이, 두 사람을 감싸고 있던 사랑의 기운이 제 발걸음을 거기로 이끌었나 봐요.


그녀는 사진을 보내줘서 정말 고맙다고, 언젠가 그들이 사는 곳을 방문하게 된다면 꼭 연락을 달라는 말도 남겼어요. 그때 셔터를 누르길, 두 사람에게 말을 걸기를 참 잘했어요. 두 사람에게는 의미 있는 사진을 그리고 제게는 꼭 한 번 다시 만나고픈 인연 하나가 선물처럼 주어졌잖아요.




2.

안젤리나의 메일을 받고 나서 제가 사진을 좋아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이내 제가 좋아하는 일들을 관통하는 두 가지 핵심이 있단 걸 알게 되었어요.


첫째 공통점은 시간.

저는 가이드로서 주로 역사歷史를 이야기합니다. 역사의 사전적 의미는 지난날의 기록과 흔적이란 뜻이래요. 제가 하는 일은 오늘날 유산이라 불리는 지난날의 건축물과 예술품을 통해 여행자의 현재와 여행지의 과거를 잇는 일입니다. 동떨어진 두 개의 시간을 하나의 프레임에 겹치는 일이라고나 할까요.


그리고 퇴근 후엔 삶의 어느 찰나에 마주한 아름다운 순간들을 잊지 않기 위해 글을 씁니다. 내면에서 스파크처럼 번쩍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이 감정들은 조금만 게으름을 부리다간 무뎌지고 바래져서 그 선명한 감정을 다시는 그려낼 수가 없게 되거든요.


사진도 비슷한 것 같아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우주에서 지금 단 한 번뿐일 그 아름다운 순간을 붙잡아 두려 셔터를 눌러요. 살아있기 때문에 보고 느낄 수 있는 삶의 순간들이 너무나 아름다워 환희로 전율할 때면 저는 그 찰나를 그냥 흘려보내지 못하고 꼭 끌어안아버리는 욕심쟁이가 됩니다.


두 번째는 사람. 

언제나 제가 좋아하는 일에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가이드란 직업만큼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일이 또 있을까요. 매일 같은 코스 같은 설명을 반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매일 함께하는 사람들이 달라지기에 오히려 저는 매일 같은 거리를 처음 걷는 기분으로 바라보고 즐기는 특권을 얻습니다. 서로의 삶의 한 순간을 공유하며 쉬어가는 시간에는 서비스 제공자와 구매자가 아닌 독립된 개인으로 각자의 삶의 이야기와 온기를 나누는 일. 제가 10년 가까이 이 일을 이어가는 가장 큰 이유거든요.


그렇게 매일 사람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하다 보면 꼭 글로 쓰고 싶은 누군가가 나타나요. 보통 제가 글을 쓰고 싶은 순간들은 어디선가 만나 제 마음에 따뜻함 한 방울 떨어뜨리고 간 순간이나 사람들을 마주한 때거든요. 그 어떤 좋았던 여행지, 물건에 대한 글보다도 사람에 대한 글은 나도 모르게 좀 더 마음을 들여 쓰게 돼요.


사진이라고 다르지 않더라고요. 보는 이까지 행복으로 물들이는 이들의 모습을 담아내거나 다양한 감정으로 나를 벅차게 했던 어느 순간을 프레임 안에 가둡니다. 그날의 바람과 공기의 냄새, 우리가 나눈 대화를 담을 수는 없지만 여전히 그날의 우리가 보았던 붉은 석양은 기록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좋은 것이라면 모두 나누고픈 지구 반대편 사랑하는 누군가와 그 순간을 공유할 수 있는 수단이 되어준다는 사실도 참 좋고요.




3.

시간과 사람. 글을 쓰다 보니 이번엔 두 개의 핵심이 만들어낸 또 다른 공통분모가 보입니다. 바로 시간과 사람 모두 통제 불가한 인력 밖의 영역이란 사실이에요. 그리고 굉장히 예측불가한 유한함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요. 삶 속에서 수많은 인연들이 밀물과 썰물처럼 오고 갑니다. 서로의 삶에 예고 없이 나타났다가 서로의 꽃이 되는 인연들이 있듯이 더러 어떤 인연들은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떠나버리기도 해요. 흐르는 시간 앞에서도 우리는 무기력하기 그지없지요. 그 누구도 시간을 멈추거나 되돌릴 수 없어요.


이제야 알겠어요. 제가 좋아하는 세 가지는 바로 내 의지 너머에 존재하는 것들을 어떤 태도로 마주 보고 다뤄야 하는지 잊지 않도록 상기시켜 주는 존재들이었네요. 비록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어도 대신 이 순간 내게 주어진 시간을 진심으로 살아내게 만들고 인연과 시간의 유한함을 자꾸만 일깨워 순간을 기록하고 담아두게 하죠.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람과 공유하는 이 순간을 귀하게 여길 수 있도록 해주었어요. 타인의 마음과 우주의 법칙은 내 맘대로 할 수 없지만 나의 태도만큼은 온전히 내 의지로 만들어 내는 것들이니까요.


그러니 어쩌겠어요. 앞으로도 일을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순간들과 사람들을 글로 쓰고, 사진으로 남겨야지요. 의지 밖 존재들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쏟을 수 있는 모든 마음을 쏟아야지요. 적어도 후회는 없도록. 순리에 맞게 흐르는 시간에 맞춰 앞으로 또 한 발 내딛는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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