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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e May 03. 2023

체코의 꽃달력

[기록을 기록하기] 여러 해 동안 쌓인 봄의 기록.





안녕. 봄이 성큼 다가온 프라하에서 글을 씁니다.


체코는 제가 살았던 나라들 중 가장 긴 겨울을 가진 나라여서 이곳에서의 봄은 사계 중에서도 유난히 더 큰 감격과 함께 찾아오는 것 같아요. 매년 어김없이 찾아오는 걸 알면서도 체코에서의 봄은 언제나 난생처음 만나는 존재처럼 매번 경이로움을 느끼게 하죠.


정말이지 봄만큼 짧아 아쉬운 게 있을까요. 봄꽃들은 단 한 번도 '이만하면 되었다' 싶을 만큼 머물러주는 법이 없어요. 유난히 모든 것들이 빨리 오고 가버리는 계절인지라 봄이 되면 매일이 설레는 동시에 가는 하루하루가 아까워 발을 동동거리게 됩니다. 봄꽃을 만나러 가는 일에 게으름을 피웠다간 이미 꽃잎을 떨궈버린 나무만 마주하게 되죠. 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삶이 얼마나 유한하고 짧은지 자꾸만 상기시키는 것 같아요. 그러니 지금에 충실하라고, 현재를 만끽하라고 말하는 것만 같달까요.



당신도 아시다시피 저는 사시사철을 그 누구보다 예민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요.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매일 같은 거리를 같은 시간에 걷다 보니 계절의 변화는 마치 낱장의 종이 위에 정성스레 올린 그림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플립북 애니메이션처럼 어떤 하나의 흐름이 되어 기억 속에 저장됩니다.

계절의 흐름을 끊임없이 느끼며 살 수 있다는 것. 제가 제 직업을 사랑하는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하죠.


출근길, 어제는 분명 앙다물고 있던 꽃봉오리가 꽃잎을 활짝 피워낸 걸 보는 아침이면 작은 행복 하나가 땡그랑, 마음의 행복 저금통에 담기는 기분이에요.


이렇게 매일 같은 곳을 관찰하는 행위는 꾸준히 쌓여 일주일이란 시간이 되고 또 한 달이 돼요. 그러다 보면 어느덧 새로운 계절이 성큼 다가와있죠. 이스탄불에 살던 시절의 내가 아야소피아 안을 비추는 태양의 방향까지 계절과 시간 별로 꿰고 있었다면 체코에서 살고 있는 지금의 나는 도심 속 꽃들이 피는 순서들을 줄줄 읊을 수 있게 되었어요. 일기장에 그날 길 위에서 만난 꽃들을 하나 둘 기록하다 보니 어느새 꽃달력이 완성되어 있었어요.

날짜가 아닌 꽃으로 지금이 일 년 중 어디쯤에 왔는지 가늠해 보는 것, 생각만으로도 참 로맨틱하지 않나요?



겨울의 끝 '스녜젠카'


설강화, 스녜젠카


한국에서 매화가 봄을 알린다면 체코에서는 스녜젠카가 봄이 전령 역할을 해요. 스녜젠카(Sněženká)라는 체코 이름은 이 꽃의 영어 이름 스노드롭(Snowdrop), 한국어 이름 설강화와 그 뜻이 같지요. 이 순백의 희고 여린 꽃을 다들 봄의 전령이라고 할 때 저는 혼자 스녜젠카를 겨울이 전하는 확실한 이별의 최후통첩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머지않아 곧 떠나 줄 것을 약속하는 통지 같은 거죠.


보통 이르면 2월의 끝자락에 스녜젠카를 볼 수 있는데 사실 체코에서 완연한 봄을 느낄 수 있는 건 못해도 4월 중순은 되어야 하거든요. 사실 2월에 설강화를 보며 봄을 기대하기에 한 달여는 너무 긴 시간이라 봄을 기다리다 제풀에 지치기 십상이에요. 그런데 스녜젠카를 겨울이 떨어뜨린 마지막 눈송이라 생각하고 나니 끝나기만을 바라며 그저 '견뎌내던' 겨울의 끝이 조금은 '즐길 만'하더라고요. 끝을 약속받고 나니 이왕 남은 시간 이 계절만의 매력을 만끽해야겠다 싶었달까요.


크로커스


그렇게 스녜젠카가 피고 나면 본격적인 꽃달력이 시작돼요. 쨍한 원색의 색감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크로커스가 스녜젠카를 잇는 다음 주자 중 하나인데 소담하면서도 화려한 꽃이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힘껏 땅 위로 솟아 오른 꽃들을 구경하다 보면 어느 날 때쯤 달짝지근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옵니다. 도시 곳곳에 자리하는 각종 과실수들이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거예요.



사랑을 담아, '아몬드 꽃'

페트르진 공원의 아몬드 꽃


그중에서도 제가 가장 사랑하는 건 바로 아몬드 꽃입니다. 그 어느 과실수 꽃보다 진한 향기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아몬드 꽃이 피기 시작할 때면 비로소 그저 누워만 있어도 좋은 햇살이 며칠 걸러 한 번 정도는 찾아온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다 3월답지 않은 기막히게 푸른 하늘과 뜨거운 태양이 어느 날 찾아온다면 그날은 한 해의 첫 피크닉을 개시하는 날이에요. 제가 가장 사랑하는 곳은 아몬드 꽃이 흐드러지게 핀 페트르진 언덕. 돗자리와 책 한 권, 커피 한 잔을 챙겨 들고 아몬드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고선 책을 읽거나 그 해의 첫 '벚꽃엔딩'을 듣노라면 겨울잠 자듯 웅크리고 있던 마음속 근심들까지 전부 사라지는 기분이 들어요. 그리고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남기죠. "아몬드 꽃이 폈어!"


아몬드 꽃의 개화가 절정에 달한 주말에 친구들과 남부의 아몬드 과수원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떠나는 일은 제게 있어 본격적인 봄맞이를 의미하는 체코살이의 연중행사 같은 일이 되었답니다. 사랑하는 조카를 위해 아몬드 꽃을 그렸던 고흐처럼 소중하게 담은 그날의 아몬드 꽃 사진을 멀리 있는 가족 친구들에게 보내며 마음을 전하죠. "네 생각이 났어." "함께 오고 싶더라."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법이니까요.

아몬드 과수원

꽃달력 퍼레이드


햇살 아래서 더욱 눈부신 노란 개나리와 흐드러지게 꽃잎을 피우는 목련, 앙증맞은 야생 수선화와 샛노란 민들레가 줄줄이 꽃망울을 터뜨리면 제 핸드폰 속 갤러리는 온통 알록달록 꽃사진으로 가득 차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찍어도 예쁘고 저렇게 찍어도 예쁘니 멀리서 또 가까이서 쉼 없이 버튼을 누르기 때문이죠.


길을 가던 모든 이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겹벚꽃과 체코 사람들이 시럽으로 만들어먹는 향긋한 딱총 나무 꽃,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 식수대 뒤에 있던 것과 꼭 닮은 등나무 꽃, 화학 약품을 사용하고 토양의 영양분을 죄다 흡수하는 통에 체코인들은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넋을 놓게하는 끝없는 상업용 유채꽃밭까지.


그러다 짙은 녹색 덤불 위로 보랏빛 라일락이 보이기 시작하면 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라일락은 봄의 시곗바늘이 정오를 막 지나면 피어나기 시작하거든요. 아쉬운 마음도 잠깐, 코를 파묻고 싶어지는 짙은 향기가 현실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그럼요. 중요한 건 지금이니까요.


그리고 나면 동글동글한 이파리에 탐스러운 하얀 아카시아 꽃송이들이 봄바람에 춤을 춥니다. 이제는 정말 여름이 시작된다는 뜻이에요. 꽃이 저문 나뭇가지 위로 빼곡하게 자란 나뭇잎들이 만들어주는 시원한 그늘이 간절한 계절이죠. 떠날 때를 안다는 것. 자연만큼만 지혜로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역시 모든 건 순리를 따를 때 가장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봄의 끝을 써 내렸건만 다행히도 올해의 봄은 여전히 한창입니다. 며칠 전 막 피기 시작한 라일락 꽃들을 보았어요. 가는 봄이 아쉽지 않도록 이제 그만 글을 마무리하고 밖으로 나가봐야겠네요. 다시 소식을 전할 때까지, 안녕.


노란 아카시아를 본 적 있나요?

야생 수선화는 작고 앙증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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