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phie Jun 29. 2023

베네치아에서도 안 베인 코를 여기서 베일 줄이야.

[이탈리아 메스트레] 뜨거운 날씨와 찬 커피와 달콤한 마리토쪼의 하루




메스트레의 볕은 뜨거웠다. 해가 머리 바로 위에 떠있는 탓에 달리 숨을 곳도 없었다.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거대한 규모의 공장형 호스텔에서는 10시 체크아웃을 요구했고, 청소를 담당하는 직원은 마음이 급했는지 9시 20분쯤 내 개인실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곧바로 미안하다며 문을 닫았지만 그 바람에 나는 짐을 싸는 둥 마는 둥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는 것도 깜빡하고 호텔을 나선 참이었다.


오늘은 이탈리아에서 열린 약 이 주간의 긴 프로젝트 참여 후 체코로 돌아가는 날. 어제 자정에 가깝도록 부지런히 걸으며 베네치아를 즐겼던 터라 오늘은 공항에 가기 전 여유롭게 메스트레 도심을 잠시 둘러본 후 맛있는 점심이나 한 끼 하고 여행을 마무리할 심산으로 별다른 계획도 없이 구시가지를 향해 걸었다.


숙소에서 시내로 가는 길은 단조롭고 지루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과거 영화로운 시절의 부의 흔적이 흘러넘치는 베네치아와 비교해서가 아니었다. 도시는 고요를 넘어 적막했으며 생동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베네치아를 가기 위해서라면 그 누구라도 꼭 거쳐야만 하는 도시 메스트레는 현지인들에게조차 그저 주거 문제를 해결해 주는 베드타운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길을 혼자 걸었다. 이따금 나무가 만들어준 그림자가 길 위에 있으면 징검다리를 건너듯 폴짝폴짝 그늘에서 또 다른 그늘로 몸을 피했다. 그늘이 사라지면 별 수 없이 땡볕을 고스란히 맞으며 걷다 보니 메스트레의 구시가지가 보였다.


아침도 먹지 못하고 나왔던지라 에스프레소 한 잔에 브리오슈 하나 곁들일 생각으로 앞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의 실내외는 현지인들로 북적거렸다. 진열대에 있는 빵 하나를 고르고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계산을 먼저 하겠다는 말에 무뚝뚝한 남자는 단 두 개의 메뉴치고는 유난히 많은 버튼을 요란스럽게 눌렀다. 카드로 계산하겠다하자 그는 내가 계산서를 보기도 전에 내 카드를 휙 가져가 비접촉 결제기에 갖다 댔고, 기기는 삐-하며 승인을 알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가 카드와 함께 건네준 계산서에는 4.5유로라고 쓰여있었다. 계산서의 내역에 적힌 건 음식의 이름이 아닌 '스낵'. 에스프레소 한 잔이 1유로니 한 입이면 끝날 저 작은 치케티(cicchetti: 작은 빵 위에 여러 재료를 얹어 만든 베네치아 지역의 한입 거리 음식. 스페인의 핀초와도 유사하다.)가 3.5유로라고? 그럼 방금 나와 같은 치케티를 두 개 주문한 로컬 남자애는 저 작은 빵 두 개를 만원이나 내고 샀다는 뜻인데, 어제 베네치아에서 먹은 치케티가 하나에 1유로였던 걸 감안하면 관광지보다도 세배 이상 비싼 셈이다.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그 남자는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게 정말 3.5유로예요?"

"그럼."

"대체 어떻게요?"

"안에 넣은 프로슈토와 크림치즈가 최상급이거든."

"가격은 어디 적혀있죠?"

"여긴 없어. 바깥에 있는 메뉴판에 있지."

"그렇군요."


우선 주문한 커피를 휙 마시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이야기한 메뉴판을 찾아 사진을 찍은 뒤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커피를 비우고 나간 내가 아주 떠난 줄 알았는지 다시 들어온 나를 그는 약간은 당황한 기색으로 의아하게 쳐다봤다. 나는 그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여기서 내가 시킨 메뉴가 어디 있는지 찾아주세요. 아무리 봐도 3.5유로짜리 메뉴는 보이지 않아서요."

그는 화면 속 사진을 손가락으로 쓱 훑더니 말했다.

"그 메뉴는 여기 없어. 빵 위에 올리는 재료는 맨날 바뀌거든."


분명 1분 전만 해도 가게 밖 메뉴 판에 있다며 어떤 메뉴판인지까지 손으로 가리키던 그가 뻔뻔하게 말을 바꿨다. 그가 나를 기만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조금 전만 해도 저기에 이 음식의 가격이 적혀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니. 우리 메뉴들의 가격이 저기 있다는 말이었지. 이 음식이 있다곤 안 했어. 대체 뭐가 문제야? 돈을 돌려주면 돼?"

그의 한마디에 별안간 메스트레의 뙤약볕이 가게 안으로 나를 따라 들어온 것처럼 머리가 뜨거워졌다.


"이봐요. 이건 돈의 문제가 아니에요. 나는 내가 주문한 음식의 정확한 가격을 물어본 거고, 당신은 자꾸만 말을 바꾸니 나는 당신이 의도적으로 관광객을 속이려 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건 금액이 얼마가 됐든 누구나 불쾌할 수 있는 상황이고요."

그는 바에 올려져 있던 빵을 도로 가져가더니 금고에서 동전을 꺼내 탁하고 놓았다. 결국 진실도, 사과도 없었다. 나도 말없이 가게를 나왔다. 베네치아도 아닌 이곳에서 눈 뜨고 코 베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빈속에 마신 커피 때문인지 방금 전 일 때문인지 속이 쓰렸다. 마음을 가라앉히며 걷는 시내에는 그렇다 할만한 것들이 없었다. 메스트레 시내의 광장은 이곳에 오기 위해 걸어왔던 거리들만큼이나 단조롭고 지루했다. 아무래도 이 도시와 나는 연이 아닌 듯했다. 시계를 봤다. 지금이라도 역으로 가서 베네치아로 가는 기차를 타면 두 시간쯤은 충분히 보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주저 없이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몸을 돌리는 순간 유리창 너머로 예쁘게 진열된 디저트들이 보였다. 이탈리아보다는 프랑스식 디저트에 가까운 무스케이크와 같은 메뉴들이었는데 나는 내부가 궁금해져 홀리듯 안으로 들어갔다.


그중에 오랫동안 찾아다니던 디저트가 보였다. 마리토쪼였다. 넷플릭스에서 로마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영화 속 남녀가 골목길 속 작은 문을 두드려 건네받는 그 생크림 가득한 빵은 내 호기심을 잔뜩 자극했었고, 이후 나폴리에 갔을 때도 마리토쪼가 없나 두리번거렸지만 로마 지역만의 음식인지 당최 눈에 띄지를 않았다. 그런데 메스트레에서 마리토쪼를 만날 줄이야!


바삐 움직이는 젊은 직원들 사이로 주인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중년의 여성이 주문을 하겠냐 물었다. 나는 베네치아 산책 대신 마리토쪼를 선택했다. 마실 것이 필요하냐 묻기에 망설이다 혹시 차가운 커피도 있냐고 했다. 이탈리아에 온 이후로 이주 넘게 얼음이 든 커피는 구경도 못한 참이었다. 그녀는 커피에 얼음을 넣어주거나 샤케라또를 만들어줄 수 있다고 했고 나는 룽고와 넉넉한 얼음을 부탁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내가 뭘 상상하고 있는지 안다는 듯 그녀가 센스 있는 눈빛으로 웃으며 되물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면 될까요?"


"정말요?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해주신다고요?" 너무 놀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말이 튀어나왔다. 내 표정이 너무 웃겼는지 주인장은 까르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를 잡고 앉아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탐스러운 마리토쪼와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아이스아메리카노가 나왔다. 나는 빠르게 사진 한 장을 남긴 후 자세를 고쳐 잡고 마리토쪼를 들어 크게 한 입을 베어 물었다. 바닐라 향이 가득한 부드러운 크림이 입 안에 가득 찼다. 기분이 우울할 때면 마리토쪼 베이커리의 문을 두드려대던 여주인공이 비로소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몇 주만에 맛보는 얼음 가득한 아메리카노와 마리토쪼를 번갈아 먹다 보니 어느새 아까 그 해프닝이 아무렇지 않게 느껴진다. 누군가의 다정한 선의와 달콤한 디저트. 부정적인 감정을 떨쳐내는 가장 좋은 두 개의 해법이 전부 내 앞에 있기 때문일 테다. 메스트레를 너무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작가의 이전글 체코의 꽃달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