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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e Jul 13. 2023

나의 이웃 아인슈타인 아저씨

[프라하 일기] 그 누구보다도 무뚝뚝하고 그 누구보다 다정한 나의 이웃.



1.

우리 집 맞은편에는 아인슈타인 아저씨가 산다. 몇 해 전 그의 이름을 알게 되긴 했지만 여전히 그의 존재를 아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그는 아인슈타인 아저씨로 통한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밝은 은발 곱슬머리가 구불구불 사방으로 뻗쳐있는, 딱 봐도 아인슈타인이 떠오르는 그의 머리 모양 때문이었다.


그는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이웃, 아니 가장 어려워하는 체코 사람이었다. 직장으로 삼는 시내 관광지 곳곳에서 매일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과 같은 건물에 사는 이웃들을 모두 통틀어 가장 퉁명스럽고 가장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건물 내에서 오며 가며 마주쳐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넬 때면 그는 마지못한 얼굴로 대꾸하는 게 전부였는데, 그나마 내게 위로 아닌 위로가 되었던 건 그는 우리가 사는 건물의 어느 누구와도 다정한 인사를 건네지도, 대화를 나누지도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매일 퇴근 후 수십 개의 화분들을 혼자 살뜰히 보살피면서도 이웃에게는 미소 담긴 화답 한 번 건네지 않는 그를 보며 나는 해리포터 속 호그와트의 관리인 필치씨를 떠올렸다.


그는 혼자 살았다. 그를 찾아오는 이를 본 적이 없었고 그는 언제나 일에서 돌아오면 파란 작업복 차림으로 차고에서 로큰롤 음악을 크게 틀고 무언가를 손보거나, 새벽 세네시가 되도록 불을 켜두고 티브이 소리를 흘려보내곤 했다.


창문을 열어두지 않고는 잠들 수 없었던 어느 무더운 여름밤. 유난히 큰 티브이 소리가 그의 집 창문 밖으로 흘러나와 건물 안마당 전체에 쩌렁쩌렁 울렸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의 구조를 설명하자면 가운데 안마당을 하나 두고 사방을 빙 둘러싼 입 구口자와 같은 구조라 특히나 고요한 밤에는 어느 소음이라도 더 크게 들리기 마련이었다.


새벽 한 시가 꼬박 넘도록 시끄러운 액션 영화 소리와 사이사이 광고 소리가 이어지자 참다못한 친구가 그의 집으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이미 얼마 전 볼륨을 줄여주십사 정중한 부탁을 하고 채 삼일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공산주의 시절 국가로부터 받았을 이 집에서 그는 평생을 살아왔을 것이고, 내가 이사 오기 전까지 다른 이웃들은 밤새 들려오는 이 소음에 대해 아무도 언급한 적이 없는 듯하니(하지 않았거나, 듣지 않았거나) 그에겐 굴러들어 온 돌인 우리가 마뜩잖았을 것이다. 성질이 난 그는 "그렇게 시끄러우면 귀마개를 하시던가"하며 친구의 면전에서 문을 쿵 닫아버렸다.


같은 층에 사는 이웃이라곤 단 두 집뿐인데. 아무래도 척을 지기는 싫었다. 창문을 걸어 잠가 비로소 고요해진 방에 누워 나는 생각했다. 자신이 내는 소음 말고는 그 어떤 살아있는 것의 움직임과 소음이 없는 공간. 그곳을 밤새 소리로 채워두는 건 어쩌면 그는 외로워서가 아니었을까라고.


2.

그 해 연말이었다. 이 집에서 처음 맞는 겨울이었고, 나는 예년처럼 어김없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혼자 쿠키를 몇 판째 구워내는 중이었는데 갓 구운 따끈한 쿠키가 너무 맛있어 혼자 즐기기엔 좀 아깝단 생각을 했다. 불이 켜진 그의 집이 보였다. 나는 접시에 쿠키를 소복이 담아 용기를 내어 그의 초인종을 눌렀다.

좀처럼 울릴 일이 없는 초인종 소리에 훽 문을 연 그는 무슨 일이냔 눈빛으로 나를 잠자코 바라봤다.

"그.. 저.. 다른 게 아니라 크리스마스여서 쿠키를 좀 구웠거든요. 좋아하실지는 모르겠지만 맛 좀 보세요."


혹시 디즈니사의 주토피아를 보셨는지. 동물들이 사는 도시 주토피아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는 관공서에 일하는 나무늘보들이 등장하는데, 주인공이 건넨 웃긴 농담에 재생 속도를 늦춘 영상 마냥 한참 뒤 얼굴에 함박 미소를 띠며 폭소하는 나무늘보의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유쾌하고 사랑받는 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문제(?)의 나무늘보 등장씬. 주토피아에서 가장 사랑스러우면서도 몇 번이고 나를 폭소하게 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예상치 못한 나의 방문과 더 예상치 못했던 내가 내민 쿠키 접시에 그는 많이 놀라 보였다. 그 순간이었다. 주토피아의 나무늘보의 장면처럼 갑자기 모든 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굳어 있던 그의 얼굴에서 입꼬리가 씰룩이더니 이내 얼굴 전체가 해사한 미소로 빛났다. 그에게도 이런 표정이 있었다는 사실도, 그가 정말 투명한 호수만치 푸르고 아름다운 눈을 가졌다는 것도, 웃으니 너무나 따뜻한 인상을 풍긴다는 것도 그때서야 알았다. 나는 이제껏 볼 기회가 없었던, 그라는 사람의 또 다른 단면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이내 함박웃음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한결 부드러운 표정과 말투로 내게 고맙다고 했다. 한 손에 접시를 받아 든 채 문 사이로 사라지는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떠있었다. 내가 그에게 꽤 행복한 저녁을 선물한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 어려운 이웃과의 관계도 이전과는 달라질 것 같단 기분 좋은 예감과 함께 말이다.


이후로 우리는 종종 서로의 벨을 누르곤 했다. 특히 코로나가 찾아오면서 집에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낼 때 나는 베이킹에 푹 빠져있었다. 크림을 듬뿍 발라 겹겹이 올린 케이크를 만드는 날이면 언제나 한 조각 큼지막하게 잘라 그의 문을 두드렸고, 휘낭시에라는 프랑스식 구움 과자에 한창 빠져있을 땐 다양한 레시피로 만든 결과물을 접시에 담아 그에게 건네며 맛이 어떤지 나중에 알려달라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그러면 며칠 뒤 서로를 계단참에서 마주치거나 내가 창문을 활짝 열고 글을 쓰고 있을 때면 아저씨가 창문 너머로 인사를 건네며 얼마전 줬던 '거시기 그 빵'은 초콜릿 맛이 가장 맛있었다고 알려주는 식이었다.

코로나 기간 내게 큰 위로와 즐거움이 되어줬던 베이킹. 그리고 아저씨는 최고의 시식 단원이 되어주셨다.


아인슈타인 아저씨는 자신의 방식으로 내게 마음을 나눠줬다. 화분에서 딴 여름 햇살 가득 머금은 토마토를 두 손 가득 와르르 쏟아주고 가거나 비가 올 예정이니 빨래를 걷는 게 좋겠단 말을 전하러 구태여 우리 집을 찾아와 주기도 해서 짐짓 나는 놀라게 만들었다. 같은 집에 사는 친구는 그가 내게 웃어주는 모습을 보고 충격받은 얼굴로 말했다. "그가 웃었어. 너한텐 웃으면서 얘길 한다고!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인데!"


3.

며칠 전, 초인종이 울렸다. 나가보니 그가 예의 파란 눈과 미소로 인사를 하며 내게 설탕 봉지를 건네줬다. 뭔가 하고 들여다보니 새빨간 체리가 한가득이다. 주말에 근교에 있는 별장*에서 따온 건데 체리철이니 맛이 나쁘지 않을 거란 말을 덧붙인다. 여름 과일 중에 체리를 가장 좋아하는 나로서는 기뻐하는 기색을 숨길 수가 없었나 보다. 감사해요. 잘 먹을게요! 호들갑을 떨며 인사하는 내게 아저씨는 멋쩍은 웃음을 건네며 총총 걸음을 돌렸다.

 


설탕 봉지 안에 든 체리가 묵직하다. 와르르 쏟아내니 정원에서 따온 것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벌레 먹은 것 없이 단단하고 예쁜 체리들만 가득하다. 따낸 체리 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들로만 골라 담았을 것이 분명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잘못 깨물어 옷 위에 튀어버린 붉은 체리즙 마냥 붉은 온기가 가슴께에서부터 퍼지는 기분이 든다.


마침 그날은 체리를 이 킬로나 사 온 날이었는데, 싱크대에 아저씨가 준 것까지 와르르 쏟고 보니 정말 체리 풍년이다. 그가 건네준 체리들은 마치 지난 5년간의 결실인 것만 같다. 비록 깊은 정을 나누는 친구는 아니지만 하나의 건물 안에서 가끔은 좋은 것들을 함께 나누고픈 존재로 서로를 여기고 있다는 것. 서로 다른 인종과 나이, 배경을 불문하고 타인의 온기와 나의 온기가 온전히 만나는 순간. 바로 이 순간들이 내가 이방인으로 세상 어딘가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의 원천이자 이유들이다.


*

한국에서 흔히 별장을 떠올리면 생각하는 번듯한 건물보다는, 도심 밖에 작은 텃밭과 과실수를 가꿀 수 있는 땅과 주말을 보낼 정도의 기본 시설을 갖춘 건물을 뜻한다. Cottage, Weekend house라고 불리는 이런 공간들은 공산주의 시절 체코인들에게는 타인의 감시와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주기도 했다. 팬데믹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 착용과 같은 규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자연 속의 별장들을 선호하게 되면서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기도 했다.


4.

삼 킬로 가까운 체리들은 전부 씻은 다음 가장 싱싱한 것들은 바로 먹고, 씨알이 작거나 조금 무른 것들은 따로 솎아내 콤포트를 만들었다. 오늘 출근 전 부지런히 일어나 크림과 우유를 끓여 파나코타를 만들었다. 퇴근 후에 만들어둔 콤포트를 올려 체리 파나코타 완성! 자 이제 조심스레 들고 아인슈타인 아저씨에게 갈 차례다. 당신이 준 체리로 만든 콤포트가 올라간 이탈리아 디저트라고, 맛이 어땠는지 꼭 알려달라고 말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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