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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e Jul 19. 2023

여름을 담아. 라벤더 시럽

[프라하 일기] 계절을 오롯이 담은 체코의 음료.




여름이 돌아왔습니다. 라벤더의 계절입니다. 체코에도 프로방스 못지않게 많은 라벤더밭이 있어요. 보라색 물결 위로 바람이 불고 수백 아니 수천 마리 꿀벌들의 날갯짓 소리가 마치 하나의 합창처럼 공기를 채웁니다.



하지만 교외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라벤더는 체코인들의 정원 그리고 잘 가꿔진 공원의 꽃밭에서 흔히 볼 수 있답니다. 정원의 라벤더를 가지째로 꺾어다 집에 두고 즐기기도 하고 침대맡에 두는 등 다양하게 즐길 수 있지만 라벤더 꽃이 저물기 전에 꼭 만들어야 하는 게 있다면 바로 라벤더 시럽이에요.


한국에서는 주로 시럽 하면 커피에 넣는 시럽을 떠올릴 텐데 여기서는 물에 맛을 더하기 위해 시럽을 사용해요. 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과거 서민들이 주스의 대용으로 사용하며 퍼지기 시작했다고도 하는데 정확한 배경을 찾아내지는 못했어요.

 체코에선 아주 보편적인 존재라 요즘은 마트에서도 손쉽게 구할 수가 있습니다. 다만 인공 향료를 첨가한 제품이 많다 보니 그 맛과 깊이가 결코 수제 시럽을 따라가지 못하는 건 당연지사예요.


저와 가장 가까운 체코 친구네 집은 매년 시럽을 만듭니다. 꽃들마다 피고 지는 시기가 다르니 늦봄부터 여름 전체에 거쳐 몇 가지의 시럽들을 만들어요. 그중에서도 라벤더 시럽은 가장 예쁜 색을 갖고 있어서 만드는 순간부터 병에 담은 후까지 긴 즐거움을 줍니다. 친구네 가족들과 함께 시럽을 만들다 보면 저는 매해 여름 통통한 매실들을 사다가 장아찌와 매실청을 담는 엄마가 생각나 향수에 젖기도 해요.


라벤더 시럽을 만드는 과정은 생각보다 복잡하면서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시럽을 만들기 위해서는 꼬박 이틀을 할애해야 해요. 하지만 만드는 과정이 까다롭지는 않아서 인내만 있다면 누구든 어렵지 않게 자신만의 시럽을 만들 수 있죠. 시럽 만들기는 시럽에 사용할 재료를 준비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정원에서 한껏 핀 라벤더를 가지째로 잘라냅니다. 그리고 커다란 유리병에 꾹꾹 눌러 담아요. 라벤더를 어느 정도 채우고 나면 물을 가득 붓습니다. 이걸로 첫날의 과제는 끝났어요. 밤새 라벤더의 향과 색이 물에 우러나도록 두는 거죠.

다음 날 만 하루를 꼬박 담가둔 라벤더를 빼내고 옅은 보라색으로 물든 물에 설탕을 넣고 구연산을 넣어 잘 저으면 시럽이 완성돼요. 어때요 참 간단하죠? 가열과 같은 까다로운 과정도, 특별한 재료도 필요치 않아요.


시럽 만들기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설탕을 녹인 라벤더 물에 구연산을 넣는 순간이에요. 처음 보았을 때 제가 어찌나 감탄했는지, 마치 마법을 보는 것 같았거든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그 마법의 순간을 글로 읽게 하는 대신 보여주고 싶어요. 이 순간만큼은 결코 제 글로 충분히 풀어낼 수가 없을 것 같거든요. 바로 이 순간이랍니다.


Gif 파일입니다. 움직이지 않는다면 이미지를 클릭해주세요.

 "It is just about chemistry." 감수성이라곤 없는 제 친구가 이렇게 말해요. 그래요. 그저 화학작용일 뿐입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걸 어떡해요. 옅고 탁한 보라색이 투명하고 밝고 선명한 분홍색으로 변하는 그 근사한 순간을 그저 화학작용의 결과로만 인식하고 싶지는 않다고요. 그런 화학 공식으로는 라벤더 시럽에 대해서 이렇게 구구절절 쓸 수가 없어요. 제 눈에 이 예쁜 라벤더 시럽은 이렇게 긴 글로 묘사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고, 읽히고, 감탄을 받을 자격이 있고요.


매년 한껏 길어진 여름 해가 천천히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바람이 더위를 식히기 시작하는 여름 저녁에 우리는 라벤더 시럽을 만듭니다. 그래서일까요. 제 눈에는 완성된 라벤더 시럽의 그 예쁜 색깔에 그 해 여름의 석양도 한 방울 들어간 것만 같아 보여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눈구름이 잔뜩 낀 체코의 가을 겨울에도 우리 집 부엌 한편엔 그해의 여름 한 조각이 자리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 또 세상이 잔뜩 아름다운 석양과, 흐드러진 라벤더 꽃을 사방에 풀어두는 그 계절이 올 때까지 작은 유리병 안 여름을 꺼내먹으며 씩씩하게 기다려야겠네요. 여름의 햇살 몇 방울 몸으로 흘려보내 마음속을 비추는 햇살만큼은 구름에 가리지 않도록요.



갓만든 시럽으로 건배를 하려는데 한국에서 놀러온 친구가 말해요. "크 언니 소주랑 먹으면 진짜 맛있겠다." (그녀는 소주칵테일을 해보겠다며 시럽 한 병을 품에 안고 귀국했어요.)
제 눈에는 완성된 라벤더 시럽의 그 예쁜 색깔에 그 해 여름의 석양도 한 방울 들어간 것만 같아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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