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에는 즉흥적인 글을 쓸 일이 드뭅니다. 블로그보다는 조금 더 '글다워야'한다라는 느낌이 있어서, 보통 블로그에 올린 글들을 한 번 걸러내고 다시 다듬어 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밤은, 오늘이 가기 전에 꼭 이 글을 올려두고 자보려고 해요.
코 앞까지 성큼 다가온 가을을 앞두고 지난 8월 31일, 유독 가을을 타는 저는 가을에게 선포하듯 기꺼이 너를 환대하겠노라며 브런치에 마지막 글을 남겼었네요. 그리고 10월 21일, 명실상부 월말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지금. 가을 결산 보고서를 써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가을의 끝에 건네받은 위로를 먼저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위로'에 대해 쓴다는 건 결국 기꺼이 환대하고자 했던 이번 가을도 결국엔 위로가 필요한 나날들이 더 많았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가을은 녹록지 않았고 때로는 힘에 부치게 매서웠으며 결국은 몸과 마음 모두 녹다운이 되어버리기도 했습니다. 몸이 약해지면 정신력도 약해지고, 그러면 평소보다 더 많은 쓸데없는 생각들이 마음을 이리저리 헤집으며 생채기를 내고, 생채기 난 마음엔 손끝 거스러미에 올이 걸리듯 그 쓸데없는 생각들이 쉽게 걸리는 탓에 머릿속까지 복잡하게 해요. 그야말로 악순환인 이 패턴이 몇 번 반복되다 보면 일상에서의 무력감을, 스스로의 무용함을 느끼게 되는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속으로 삼키는 이야기가 많아진다는 게 아닐까 종종 생각합니다. 일상 속 작은 일들과 감정까지도 시시콜콜 나눠대던 시절을 지나 각자의 무게를 짊어진 성인이 된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구태여 내 삶의 무게까지 보태게 될까 봐, 걱정하게 만들까 봐 웬만한 이야기는 혼자 삼키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씩씩한 나의 자아를 세워두고 책임감 있는 사회의 구성원의 역할을 다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내지요.
2.
2016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가이드로 일하던 시절 만난 친구가 있습니다. 첫 만남에 놀랍도록 많은 마음속 이야기를 나누었던 우리는 지금까지 좋은 친구로 서로의 삶의 한 부분을 함께하고 있어요. 당시 풋풋한 대학생이던 친구는 어느덧 시간이 흘러 첫 만남 우리의 대화의 한토막이었던 그녀의 구 남친이자 현 남편이 된 분과 결혼을 하고 며칠 전 바르셀로나로 신혼여행을 떠났답니다.
돌아간 그 도시에서 그녀는 내 생각이 난다며 바르셀로나의 근황과 함께 6년 전 우리가 처음 만날 저의 투어를 추억해주었어요. 그 순간 오래전 바르셀로나에 뿌려두고 온 추억들 중 일부가 제게 와서 안겼어요. 분명 지금 저는 체코에 있는데, 겨울 냄새가 공기에 가득한 체코에서 바르셀로나의 한 여름밤 냄새가 나는 것만 같은 건 제 착각이었을까요.
누군가의 기억 한편에, 그것도 여행이라는 특별한 기억 한편에 남아있는 사람으로서 그 기억의 가치가 퇴색되지 않도록 앞으로도 좋은 사람, 좋은 가이드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돌덩이처럼 짓누르던 답답한 마음이, 스스로의 무용함에 대한 의심이 사라져 있는 것을 깨달았어요. 나의 어떤 한 면이 나를 초라하게 위축시키는 날, 친구가 콕 집어준 나의 다른 한 면이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며 나는 여전히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나를 위로해주었던 거죠.
엄마 아빠 딸 아들 언니 동생 친구 지인 투어가이드 의사 직장인- 우리를 정의하는 수많은 역할들과
나이 성별 성격 성취도 생김새 취향- 우리를 이루는 유무형의 요소들.
오늘의 저는 나란 사람이 여러 단면들이 모여 이루어진 복합적인 존재라는 사실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비록 내가 가진 모든 면이 번쩍거리는 삶은 아닐지라도 그중 한 면쯤은 반짝이는 꽤 괜찮은 사람일 수 있게 해주었으니까요.
오늘 밤 못난 사람으로 스스로를 정의할 뻔했던 내게 나의 반짝이는 면을 바라보게 해 준 그녀처럼 오늘이 가기 전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나의 위로가 닿기를 바라봅니다. 그대 또한 매일 주어진 일상 속에서 그대의 어떤 한 면이라도 반짝일 수 있도록 무던히 노력하고 묵묵히 살아가는 꽤 멋진 사람임을 잊지 않길 바라면서요.
속으로 삼키는 일이 많아진 어른에게는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대가 없는 위로가 필요한 법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