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주, 아니 이주 가까이 지난하게도 비가 내렸었다. 그냥 보슬비도 아니고 우르르 쾅쾅 천둥 번개까지 꽝꽝 울려대면서.
아주 이른 시간 오전 투어가 있던 날. 일찍 집을 나서는데 청명한 가을 냄새가 코 안으로 훅 끼쳐온다. 입추와 처서를 지나면서도 '그래도 아직 8월인데' 하며 내심 희망을 품었었는데 아- 결국 올 것이 오고 말았다. 가을이 왔다.
아침에 일어나는 건 늘 힘들지만 대신 오전 투어를 하면 남은 오후는 몽땅 내 시간이 된다. 날씨가 너무 좋았다. 일기예보를 보니 앞으로 추워질 일만 남았다. 아마도 올해의 마지막 수영. 애석하게도 오늘이 올해 여름과 작별을 고할 바로 그날인가 보다.
집에 돌아와 수건과 일기장, 책 한 권을 챙겼다. 한국에서 오는 친구에게 부탁해 받았던, 아끼고 아껴두던 두 번째 책을 개시하기에 알맞은 날이었다.
뒤에 오던 아가씨가 저만치 나를 앞설 때까지 나는 서두를 것 없는 느리고 또 느린 걸음으로 책을 한 손에 들고서 길을 걸으며 낄낄거렸다. 나무 그늘과 햇살이 반복되는 길을 걸으며 등 뒤로 태양에 잘 달아오른 더운 바람이 훅 끼치고 또 그늘의 선선함이 땀을 말리기를 여러 번 반복할 즘 수영장에 도착했다.
햇살 아래 자리를 잡고 바게트와 프라푸치노를 먹으며 책을 읽었다. 햇볕에 화상을 입지 않게 이따금 뒤돌아 눕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야금야금 올린 체온으로 차가운 계곡물 수영장이 버틸만하겠다 싶을 때쯤 첨벙! 물로 뛰어들었다.
수영을 하고 출출해진 내 발목을 잡은 랑고쉬. 동생에게 사진을 보냈더니 맥주는 왜 없냐고 바람을 넣는 통에 맥주까지 시켜버렸다. 아니 그런데!!!!! 인생 랑고쉬를 여기서 만날 줄이야! 맥주 한 모금 랑고쉬 한 입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그 둘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낄낄 킬킬 깔깔. 오늘 하루 이 책은 시도때도 없이 나를 폭소하게해서 아주 여러번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트램에서 수영장에서 그리고 길을 걸으면서도 나는 혼자 웃음이 터져버렸고, 사람들의 시선은 흘끔흘끔 당혹과 미소 그 어딘가를 오갔다. 결국 나는 위 아랫입술을 야무지게 앙다물고 힘을 주어 씰룩씰룩 달싹거리며 웃음이 새어 나오는 입술로 웃지 않는 것처럼 웃기 위해 애썼다.
지난가을엔 동생이 내 옆에 있어주었고, 함께 스위스와 터키도 여행하면서 몸과 마음을 바쁘게 했었는데, 올가을엔 오롯이 혼자여서 조금 겁이 난다. 온갖 일들이 가을마다 일어난 탓에 나는 가을을 탄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에겐 좋은 날씨 하나에 행복해지고, 책 한 권에서 절제가 필요할 정도로 넘치는 웃음을 꺼내올 줄 알고, 맛있는 음식 하나에 하루를 충만하게 기억할 수 있는 건강한 마음이 있다. 이따금 나를 슬퍼지게 하는 추억일지라도 그동안 쌓아온 알록달록한 감정과 추억 더미 중에서 그 어느 하나 버리고 싶은 부분은 결코 없다.
사계절 중 한 계절 잠시 찾아오는 감정이려니, 이 또한 일 년에 고작 한 번 느낄 수 있는 기분이려니 하며 힘껏 너를 환대하겠다. 기꺼이 환대하고 끌어안으며 나는 또 살아내겠다. 그러니 부디 바라건대 올해는 너도 조금은 다정하게 나를 대해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