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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e Dec 28. 2023

체코에서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들려오는 마법의 주문

[가이드의 일기장] 눈밭에 빠진 버스로 인해 길 위에 버려졌다.




 "에구머니나!"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으신 고운 은발의 노부인이 기차 2층으로 올라오시려다 우리를 보고 놀라 멈칫하셨습니다.


"괜찮아요. 안쪽에 자리가 아주 많으니 올라오세요."


기차의 2층 객석의 초입부터 열세명의 외국인들이 앉아있으니 위층 좌석도 꽉 찼구나 싶어 발길을 돌리려던 그녀에게 제가 말했죠. '아하'하며 싱긋 웃으면서 계단을 올라온 그녀는 우리 일행을 보고 놀라며 영어로 물었습니다.


"와 정말 큰 그룹이네요. 다들 어디로 가는 건가요?"


"코젤 맥주 공장이요. 저는 가이드고 제 손님들이에요."


"어디서 왔는지 물어도 될까요?"


"저희는 모두 한국 사람이에요."


"그렇군요. 체코에 오신 걸 환영해요. 좋은 시간 보내고 가기를 바랄게요."


그녀는 우리와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어요. 그리고 제가 맥주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체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보았죠.

얼마지 않아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고, 계단으로 걸어오며 우리에게 말했어요.


"있잖아요. 당신들의 말은 마치 노랫소리 같아요. 무슨 말인지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듣고 있으니 참 즐거웠어요."


"어머나. 그렇게 느끼셨다니 저희도 기뻐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Hezké svátky(메리 크리스마스)."


"여러분들도요. Hezké svátky."


Hezké svátky. 좋은 연휴 보내세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체코어 표현 중 하나입니다. 11월 말,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고 나라 전체가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젖어들기 시작하면 상점에서도 거리에서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는 인사대신 좋은 연휴 보내세요.라는 인사가 사람들 사이에 오가기 시작해요. 메리 크리스마스에 해당하는 인사도 있기는 하지만 왜인지 사람들은 이 인사를 더 많이 쓰고는 하죠.


11월의 끝자락이 되면 분명히 지난주와 별다를 것 없이 눈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우중충한 겨울 날씨조차도 어찌 된 일인지 낭만적으로만 느껴지고는 합니다. 크리스마스의 마법이 시작됐다고나 할까요. 그러면 저는 상점을 나오며 직원에게 1년 간 꺼낼 일 없던 반가운 인사를 건넵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그러면 상대도 1년 만에 듣는 그 인사에 활짝 미소 지으며 화답하죠. "감사해요. 당신도요. 좋은 연휴 보내세요!"  


이 인사가 오갈 때마다 왜인지 제 눈에는 조그만 비눗방울이 하나씩 보이는 것만 같아요. 온기를 담은 비눗방울은 이내 팡하고 터지며 추운 겨울날에 온기를 더하는 것만 같죠. 그렇게 도시 곳곳에서 온기 가득한 비눗방울이 퐁퐁퐁 터지며 공기를 덥힙니다.


아이고 그런데 어쩌면 좋을까요. 분명 기차에서 버스로 갈아탈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좋았는데, 곤란한 상황이 생겨버렸어요. 요 며칠 눈이 거의 매일 내리더니, 공장으로 향하던 버스가 쌓인 눈에 빠져버렸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바퀴는 헛돌기만 해요. 한참을 씨름한 끝에 기사님은 승객들에게 말합니다.


"다들 내려주셔야겠습니다.  버스가 꼼짝하질 않아요."



밖에선 굵은 눈발이 날리고, 내린 곳은 다른 마을에서 홀로 동떨어진 곳인데 여기서 내리라니. 다른 승객들이 대체 차량이 오는 거냐 물었어요.


"오긴 하겠지만 몇 시간이 걸릴지 모르니 걸어가시는 게 빠를 거예요."


머리가 새하얘집니다. 여기서 공장까지 걸어가려면 족히 30분은 더 걸릴 텐데 투어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었거든요. 어쩌겠어요. 지금으로선 달리 방법이 없으니 손님들과 함께 눈길을 걷기 시작했어요. 눈이 세차게 날리니 우산을 잡은 손이 차다 못해 아릿하게 아파옵니다.


열두 명의 손님들을 업고 나를 수도 없으니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다 핸드폰을 열어 캐럴을 틀었어요. 머라이어 캐리의 명곡 그 첫 실로폰 멜로디가 흘러나옵니다. 어쩐지 모두의 발걸음과 표정이 한결 가벼워진 것만 같아요.


노래를 세 곡쯤 들었을까요. 드디어 큰 도로가 저 멀리 보입니다. 드물지만 차들이 종종 지나가는 걸 보고 퍼뜩 이런 생각이 떠올랐어요. '히치하이킹을 해보자.'



차가 지나갈 때 엄지를 들고 팔을 휘휘 위아래로 흔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내 손바닥 두 개를 싹싹 비비며 간절한 표정으로 빌기 시작했어요. 아마도 그때의 제 표정은 제발요. 저 좀 살려주세요. 하는 표정이었을 거예요.


카시트에 아이들을 태운 차가 지나가며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거나 짐을 실은 밴이 지나가며 곤란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어요. 어쩔 수 없죠. 천사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그러다 차 한 대가 드디어 속도를 줄이고 비상등을 켜며 멈췄어요. 버스가 고장 났노라고, 2킬로 떨어진 코젤 공장에 가는 길이었다고, 혹시 괜찮으면 몇 명이라도 차에 태워줄 수 있겠냐 물었더니 운전자는 흔쾌히 문을 열어주었어요.


그렇게 네 사람의 손님들 먼저 보내고 또다시 길을 걸으며 손을 싹싹 빌었습니다. 또 한 대의 차가 섰어요. 창문을 내린 유쾌한 인상의 청년은 제 이야기를 듣더니 '물론이지.' 하며 차에 타라고 손짓했어요. 그리고 저에게 영어로 물었죠. "데려다주고 다시 나머지를 태우러 오면 되니?"


너무나 친절한 제안이지만 미안한 마음에 이도저도 대답하지 못하는 곤란한 얼굴로 저는 그에게 바쁜 건 아닌지 물었어요. 그러자 그는 유쾌한 얼굴로 활짝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괜찮아. 그리고 크리스마스잖아! It`s fine. And come on, It`s Christmas!"


그 대답이 너무 따뜻해서, 꽁꽁 얼었던 얼굴과 손까지 전부 녹아내리는 것 같았어요. 제가 엄지를 척 올리며 말해줬어요. 메리 크리스마스. 당신이 바로 우리의 천사라고.



두 번을 오가며 우리를 도와준 청년에게 이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어요. 아침에 구워온 작은 디저트가 있어 전해주려 하자 그마저도 손사래를 치기에 별 것 아니니 받아달라 부탁해야 했죠. 그는 떠나기 전 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어요. 잠깐의 난관 뒤에 찾아온 이런 따뜻하고 특별한 기억이 부디 그에게도 저의 손님들에게도 좋은 추억으로 남았으면 하고 바랐어요.


"자 찍을게요. 하나 둘 셋 -"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쁨을 가득 담아 외쳤어요. "메리 크리스마스!"

그가 차를 타고 떠나며 창 밖으로 제게 웃으며 소리칩니다. "Hezké svátky!"


이번엔 커다란 비눗방울 하나가 우리 머리 위에서 팡- 하고 터지는 것 같습니다. 모두의 뺨이 즐거움과 기쁨으로 상기되어 있네요. Hezké svátky. 아 정말이지 들어도 들어도 기분 좋은 말이에요.




눈길에 버스가 멈췄던 날. 눈이 이렇게나 많이 왔었어요. 그런데 정작 다음날인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몽땅 녹아버려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포기해야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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