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어 중 들려온 폭발음. 자살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
2016년 1월 12일 아야 소피아 내부.
난생처음 느끼는 거대한 굉음이 건물 전체를 흔들었다. 난데없는 폭발음이 건물을 집어삼킨 직후 아야소피아의 내부엔 공기와 소리까지 모두 집어삼켜진 듯한 진공상태의 침묵이 찾아왔다. 무엇이든 빨아들인다는 블랙홀 내부의 고요가 이런 것일까. 시간마저 멈춘 것 같았다.
폭발음이 건물을 뒤흔들던 그 찰나의 순간에 나는 아야소피아의 붕괴를 예상했다. 1500살이나 된 이 거대한 건물이 무너지는 게 아니고서야 설명할 도리가 없는 류의 폭발음에 눈을 질끈 감았으나 머리 위로는 어떤 것도 떨어지지 않았다. 십 수 명의 손님들 앞에서 2층의 납기둥을 설명하고 있던 나는 흐트러진 집중력을 가다듬고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십 분쯤 지났을까. 주머니 속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업무 중에 전화가 오는 일은 드물었다. 우웅 우우웅. 동시에 손님들의 핸드폰에서도 수신 알람과 진동이 연달아 울리기 시작했다. 누군가로부터 걸려온 전화, 그리고 메시지였다. 기시감이 들었다. 심상치 않은 일임을 직감했다.
양해를 구하고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가족들과 친구들에게서 걸려온 부재중 전화와 수백 개의 카톡 알림으로 화면이 빼곡했다. 무슨 일인지 파악하려 애쓰는데 외교부에서 전송된 로밍 메시지를 받은 손님들이 내용을 먼저 공유해 주었다. 가이드님. 밖에서 테러가 났대요.
바로 옆 히포드럼 광장에서 자살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고 했다. 너무나 비현실적인 소식이 믿기지 않았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제야 좀 전의 그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납득이 되었다. 14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이 일어난 광장에서 우리가 있던 아야소피아 까지는 고작 이백여 미터에 불과했다. 나 또한 곧 손님들과 아야소피아를 떠나 술탄 아흐멧 자미(블루모스크)*로 가는 길 히포드럼을 지날 예정이었다. 온몸의 털이 쭈뼛 곤두섰다.
오래지 않아 회사에서도 연락이 왔다. 사무실에 있는 동료들이 실시간으로 외부 상황을 전달해 주며 안전한 복귀를 위한 시점을 모색했다. 한 시간쯤 더 기다렸을까, 정부에 의한 수습이 끝나고서야 복귀를 지시하는 연락을 받았다. 이 글을 쓰며 다시 그때의 순간들을 되짚어보았으나 아야 소피아를 나와 사무실로 복귀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단 하나도 남아있는 기억이 없다. 공기 중에 떠있던 혼란과 불안의 냄새만이 한데 뭉친 먼지공처럼 기억보단 느낌에 가까운 형태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복귀 후 손님들의 귀가를 일일이 돕고 나니 몇 시간이 흘러있었고 그제야 나도 퇴근을 했다. 돌아오는 길 가게마다 오늘 사건에 대한 뉴스보도가 흘러나왔고, 한국 포털 사이트에서도 이스탄불 테러에 대한 뉴스가 1면을 채우고 있었다. 침대에 누워 쌓여있던 메시지에 무탈함을 알리는 답장을 하나씩 보냈다. 오늘 겪은 일이 얼마나 위험한 순간이었는지 비로소 실감이 났다.
사건 당일 느낀 기시감은 2011년의 경험에서 온 것이었다. 당시 나는 이집트에서 유학 중이었는데, 전 주와 다를 바 없던 금요일 오전 외출을 준비하며 핸드폰을 확인하니 신호가 잡히질 않았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친구들과 만나고 나서야 무바라크 정부가 집회를 막기 위해 아예 전화선을 끊어버렸단 걸 알게 되었다. 전화선을 끊어버렸으니 국제 전화도 인터넷 전화도 걸 수 없었다. 그렇게 이방인이었던 우리는 이집트 민주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철저히 고립되었다.
21세기에 살면서 계엄령을 겪게 될 줄이야.(라고 쓰는 이 시점에 나는 무려 계엄령을 두 번이나 겪어본 사람이 되어버렸다.) 통행이 제한되고 제트기가 도심을 날아다니는 소리가 밤낮 이어졌던 날들. 우리는 매일밤 이 모든 상황이 해결될 내일을 기대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내일을 알 수 없는 하루들이 흘러 꼬박 이주를 채워갈 때쯤 긴급 귀국 비행 편이 마련되었고, 우리는 그렇게 급작스럽게 이집트 생활을 정리했다. 살면서 다시는 없을 것 같은 생사의 기로에 맞닥뜨린 이런 경험을 오 년 만에 다시 하게 될 줄은, 그때는 정말로 몰랐다.
테러 사건 이후 예약은 눈에 띄게 줄었다. 투어가 아예 없는 날도 허다했고, 사실상 이스탄불의 모든 거리가 텅텅 비다시피 했다. 회사의 입장에선 큰 위기였다. 삼월의 어느 날. 사장님이 나를 불렀다. 커피 한 잔 위로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 건너왔다.
산슬씨. 바르셀로나에 가서 일해보는 거 어때요?
대학에 진학할 때 나는 아랍어와 스페인어 사이에서 오래 고민했다. 결국 부전공으로 스페인어를 배웠지만 학위는 따지 못했는데, 그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던가? 그게 언제였든 사장님이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던 듯했다.
스페인에 사는 건 오래 꿈꿔온 버킷 리스트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 순간 내가 선뜻 대답하지 못했던 것은 제안 자체가 매력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스탄불과 이별할 준비가 되질 않아서였다. 당시 나는 이스탄불을 아주 깊이 사랑하고 있었고, 사계절을 보내며 어느덧 이곳은 내게 집이 되어 있었다. 이스탄불에서 일 년간 꾸려낸 일상 속 모든 것들이 너무나 소중해서, 어떤 작은 것 하나도 놓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피고용인이었고, 사실상 위기를 맞이한 회사에서 다른 대안은 없었다. 살다 보면 내 삶의 방향이 내 의지와 능력 밖의 상황으로 인해 흘러갈 때가 있고, 그런 순간이 바로 지금이었다. 한 주 뒤, 나는 바르셀로나로 가는 짐을 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