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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니 Dec 19. 2020

1년 전 오늘, 런던에서.

런던에서 살아남기#6


일 년 전 오늘, 런던에서 혼자 뮤지컬 <스쿨 오브 락>을 봤다.


그 당시 나는 영국의 겨울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어둑어둑하고 스산하게 추운 계절 안에서 빼곡히 적힌 to do list를 보며 밤마다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눈물로 뱉어내는 중이었다.


화면 너머로 매일 같이 거무죽죽한 얼굴을 보이는 딸에게 제발 나가서 공연이라도 봐라, 라는 부모님 말씀에 예매했던 공연이 뮤지컬 <스쿨 오브 락>이었다. 그런데 이것 조차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매표소에 앉아 있었던 시절, 공연 날짜를 헷갈려 다른 날짜에 극장에 오는 관객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본인 의지로 선택한 공연과 날짜를 어떻게 헷갈릴 수 있을까, 어쩔 줄 몰라하는 관객들의 얼굴을 보면서도 그들의 혼란스러움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런데,

공연 보기 위해 무거운 몸을 이끌고 극장 앞에 도착한 그 순간, 오늘이 아닌 내일 공연을 예매했다는 사실을 (심지어 전화로 물어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설상가상으로, 아니 어쩌면 당연히, 당장 내일인 공연은 취소도 날짜 변경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어찌했는가 하면, 그다음 날 다시 갔다. 그리고 공연을 봤다.


다시 보러 가서야 찍었던 극장


공연은 좋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런던에서 본 공연 중에 가장 신났다. 


그런데 그보다 더 뚜렷하게 기억에 남는 장면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봤던 극장 가의 골목이다. 

맘마미아, 티나, 라이온 킹, 스쿨 오브 락. 이름 자체가 공연인 작품들이 한 골목에 줄줄이 걸려있었다. 가뜩이나 지친 상태에서 몸과 마음을 더 지치게 만들었던 스스로의 실수까지 얹어진 채로 보고 나온 공연, 그 후의 광경이 그랬다. 눈 앞에 걸린 네온사인들이 내가 왜 지친 몸뚱이를 이끌고 여기까지 왔는지 그 이유를 증명이라도 하듯 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때의 그 기분이 이 사진을 볼 때마다 떠오른다. 이 도시에 온 이후로 가장 지쳐있던 날, 런던에 온 이유이자 결실을 봤던 그 순간.


1년 전 오늘, 그날 밤의 골목.



과거의 내가 들으면 어이없어할 말이겠지만, 문득 1년 전 그날 밤의 골목이 그리워진다.

해내야 하는 것들 사이에 파묻혀 그 틈새로 빛을 냈었던 1년 전 12월의 밤. 늘 그렇듯이 지나고서야 그 시간의 의미를 깨닫곤 하지만, 저 날만은 바스락거리면서 지쳐가는 나에게 버텨내고 있는 오늘의 의미를 누군가 미리, 살짝 보여준 듯한 느낌이 드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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