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튼바이시리우스 Sep 12. 2017

결핍과 해방, 그리고 글쓰기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을까?


“결핍에 예민한 사람들이 문학을 지향하게 된다.”

은교의 작가 박범신이 말했다.

“문학은 행복에서 오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글을 쓴다는 건 자기 구원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거든요.”




예술의 경지가 스스로에게 주는 쾌감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타인이 안겨주는 인정의 만족보다는 자기표현과 자기 세계의 발현에서 오는 쾌감이 더 가까운 답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글자 한자, 문맥 하나에서 나의 사유와 사고를 희석됨 없이 온전히 담아내고 싶다는 욕망. 그래서 종이 위에 남겨놓은 작문은 내게는 다른 세상과 나의 세상을 연결하는 작은 문에 더 가까운 의미일지 모른다.


연필을 쥐고 글자를 쓰던 시절부터 받아놓은 상장 중 대부분은 글쓰기를 통한 것들이었다. 실상 그것 중 내세울만한 이력이란 전무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시’라는 이름으로 몇 줄의 문장에 담아낸 감상적 글쓰기는, 그 시절 내가 예술이란 범주에서 허락받은 유일한 희열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월과 현실 앞에 나의 '감상'은 '일상'에 떠밀려버렸다. 내 머리 속 생각의 '놀이'는 일터가 강요하는 행정의 '논리'에 집어삼켜졌다. 그렇게 내가 적어놓은 글에는 이래저래 괜한 쓴내가 묻어있기 일쑤였다.


내 삶이 치열한 것보다 어쩌면 내 생각이 더 치열했다. 눈 앞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더 고민한다. 발 앞에 다가온 현실보다 그것이 가진 본질에 대해 더 고민해본다. 그런 고민의 답이 혹여나 세상의 잣대로는 일말의 여지가 없는 오답은 아닌지 못내 초조와 불안을 느낀다. 한편으로는 나의 답이 세상이 내어준 질문지에 결코 틀린 답이 아니란 것을 보여주고 싶은 치기도 가져본다. 이 양자의 감정이 바로 내가 글을 쓰지 못하게 만드는 두려움이자 글을 쓰고 싶은 동기이기도 하다.


타인에게 나의 고민과 대안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나에게 수많은 틀과 고리가 필요했다. 개개별 사람들이 가진 인식의 프레임과 교감할 수 있는 모양의 틀, 사람들이 내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만한 다양한 연결고리들을 찾고 싶었다. 어느 틀에 담아야 모양이 맞는지 알 수도 없고, 어느 고리에 걸어야 흘러내리지 않을지 답답하기도 했다. 그런 초조함과 답답함이 어느덧 나에게 지식에 대한 강박스러운 결핍을 만들기 시작했다. 점점 더 통찰에 대한 갈망을 재촉했다. 원대한 혜안과 여유가 넘치는 통찰을 엮고 엮어 결국 나를 통해 어느 누군가들이 단 하나의 영감을 가져갈 수 있기를 갈망했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스스로의 결핍이 야기하는 구속과 성찰, 나아가 성장이라는 일련의 과정이 글쓰기라는 수단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처럼 글쓰기를 통해 궁극적으로 내 결핍이란 것이 어느 수준에서는 해방의 단계에 이르리라 믿기 때문이다. 시대의 지성인이 아니더라도 인간 중심의 본질적 가치와 진리에 통찰을 가진 품위 있는 작은 시민이라도 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내가 인류라는 공동체 안에서 조금이나마 플러스로 존재하고픈 자기만족의 끝이자 자아의 실현이라 믿기 때문이다.

 

“결핍에 예민한 사람들이 문학을 지향하게 된다.”


끝없는 지향을 통해 고민하고 공부하려 한다. 종이 위에 그것들을 펼쳐서 나의 결핍과 세상의 작은 틈들을 조금씩 채워보고자 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루어질 해방을 꿈꾸어본다.


결핍과 해방 그리고 글쓰기, 이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한 단상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