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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Jul 19. 2024

육체의 블랙박스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새로워진 3연 : 네 명의 서술자가 전하는 열다섯 명의 이야기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서핑을 좋아하는 19살 청년 ‘시몽 랭브르’가 교통사고로 인해 뇌사 판정을 받게 되면서, 그의 장기(특히 심장)가 이식되는 과정을 둘러싼 시몽의 부모님, 여자친구, 전담 의사, 간호사, 장기기증 전문가, 이식 담당 의사, 장기이식 대상자 등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다소 멀게 느껴지는 장기이식 과정의 이야기를 다양한 관점에서 서술한다.


2019년 초연과 2021년 재연에 이어 올해 3연으로 돌아오면서 캐스트에 변화가 있었다. 초연부터 꾸준히 참여해온 남성 배우 손상규, 윤나무와 더불어 두 명의 여성 배우 김신록, 김지현이 추가된 것이다. 최근 연극·뮤지컬을 둘러보면 여성 주연 작품과 함께 젠더프리 배역이 늘어나고 있는데, 다소 한정적으로 활용되곤 했던 과거 극의 여성 배역들을 떠올리면 이러한 변화가 정말이지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한 명의 배우가 열 명이 넘는 캐릭터를 연기하며 홀로 공연을 이끌어가는 일인다역 극이기 때문에 두 성별을 모두 연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서술자의 성별이 연기에도, 이야기의 전개에도 영향을 주지 않으니 제작진 입장에서도 무리하지 않고 젠더프리 캐스팅을 시도하기에 적절한 극이었을 것이다.



마일리스 드 케랑갈 作 장편소설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재연을 보고 왔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에는 관극 전에 내 나름대로 준비를 했다. 티켓을 예매하자마자 곧장 도서관으로 가서 원작소설을 빌려온 것이다. 아쉽게도 절반밖에 읽지 못한 채로 극장에 들어갔지만, 반 정도라도 읽고 들어간 나의 한줄평은 연극에 소설을 정말 잘, 아주 잘 옮겼구나!였다.


압축적으로 이야기를 진행해야하는 공연의 특성상 생략된 묘사들이 있다는 걸 책을 읽은 나는 알 수 있었지만, 작년에는 그런 공백을 하나도 느끼지 못했다. 올해의 나 역시도 이야기 전개에 의문을 느끼거나 하는 문제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소설 특유의 3인칭 문체를 그대로 대사로 옮겼음에도 불구하고, 보는 입장에서 전혀 어색하지 않았던 것이 신기했다. 이는 배우가 해당 인물의 목소리로 3인칭 대사를 읊으며 인물에 따라 뚜렷한 개성을 표현해준 덕분이겠지. 연출진과 배우의 합이 잘 맞아떨어진 웰메이드 연극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반드시 관극 전에 소설을 읽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연극이 마음에 들었던 사람들은 후에 책을 꼭 찾아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인물의 감정 묘사와 함께, 그들과 관련된 크고 작은 설정들이 당연하게도 더 자세히 적혀있다. 가령 작중 장기이식 코디네이터 ‘토마 레미주’가 좋아했으며, 소설(과 연극)의 제목에 차용된 것으로 보이는 아래의 문구처럼, 재미있는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 어떻게 해야 할까, 니콜라이?
- 죽은 자들은 땅에 묻고 살아있는 자들은고쳐야지.

/ 장편소설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中
희곡 「플라토노프」인용문



'나'로 살아있다는 것


이 극을 보다보면, 개별 인간의 존재와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무엇이 나를 ‘나’로 존재하게 하는걸까?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행하는지가 ‘나’의 존재를 증명한다면, 내가 더 이상 아무것도 좋아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이성’의 상태가 된다면 나의 존재는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마찬가지로 내 주변의 누군가가 그런 상태가 된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뇌사 판정이 곧 사망선고라고 보는 근거가 바로 이 논리에 있다. 인간이 더 이상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없는 뇌사 상태에 이른다면, 그는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


이에 따르면 뇌사 상태인 시몽 랭브르는 죽었다. 하지만 시몽 랭브르의 육체는 아직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 육체에서 심장을, 눈을, 신장을 꺼내어 다른 사람에게 건넨다면 시몽 랭브르는 죽은 것일까, 살아 있는 것일까? 시몽 랭브르가 바다를 보던 눈을, 파도소리를 듣던 귀를, 사랑을 느끼고 행복을 느낄 때 힘차게 뛰던 심장을 다른 누군가에게 넘긴다면, 시몽 랭브르의 육체는 더 이상 시몽 랭브르의 것이 아니게 되는가? 그렇게 장기를 꺼내고 텅 비어버린 시몽 랭브르의 몸을 보면서 마리안과 션은 그것을 시몽 랭브르라고 부를 수 없게 되는가? 자신의 심장으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시몽의 심장을 이식 받을 수밖에 없는 클레르는, 클레르의 삶을 사는 것인가, 아니면 심장을 받은 순간부터 시몽의 삶을 살게 되는가? 


소설과 극에서 마리안이 되뇌이는 의문처럼, 극을 보는 관객도 정답이 없는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질문을 끝없이 곱씹게 된다.

그렇다. 그 모든 게 여기 있다.
하지만 시몽의 표정은,
그 아이 안에서 살며 사고하는 그 모든 것은,
그에게 생명력을 부여하는 그 모든 것은,
과연 그것은 전부 다 되돌아올까? 

/ 장편소설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中



사람들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


한편, 시몽 랭브르의 죽음을 둘러싼 24시간의 이야기 속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사라진다. 그 과정에서 어쩌면 시몽 랭브르의 장기이식과는 관련성이 조금도 없어 보이는 설정을 들을 수 있다. 장기이식 코디네이터 ‘토마 레미주’의 성적 지향성, 간호사 ‘코르델리아’가 연인과 재결합하여 밤을 함께 보내고 병원에 왔다는 사실, 전문의 비르질리오의 자수성가 과정과 그가 아르팡 가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열등감까지, 소위 말하는 TMI(Too Much Information, 쓸모 없는 정보)로 극은 여백 하나 없이 빼곡하게 채워진다.


시몽 랭브르가 죽음을 겪고, 주변인은 그로 인한 슬픔을 겪는 와중에 누군가(코르델리아)는 자신의 일을 해내며 존재 가치를 느끼고, 누군가(피에르 레볼)은 아무런 감흥 없이 업무를 기계적으로 행하고, 누군가(알리스 아르팡)는 다시 뛰는 심장이 보이는 생명력에 경이로움을 느끼고, 누군가(관객)는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며 자신의 심장이 뛰고 있음을 인식한다. 내가 살아있음을 깨닫는 동시에,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모습 또한 떠올리게 된다. 참으로 묘한 감정이 파도치게 하는 공연이다.

정신없이 어질러진 수술방을 정리하는 시간,
수술 팀이 흩어져서 첫 전철을 타기 위해 병동을 떠나는 시간,
원래의 안색을 되찾은 알리스가 살짝 미소를 짓기까지 하는 시간,
비르질리오가 모피로 된 그 코트의 깃을 다시 바로잡아주는 시간.
지금 시간은. 

/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中



파도의 상징성


내용을 알고 보면 원작소설의 책 표지도 참 재미있다. 일정한 패턴으로, 그러나 조금씩 높낮이를 달리하며 들이치는 파도. 마찬가지로 일정한 패턴이지만, 매 순간 동일하지는 않은 심장박동 그래프. 시몽 랭브르가 사랑하던 파도로 시작된 이야기가 시몽 랭브르의 심장박동을 주시하며 마무리되는 것처럼, 표지의 파도도 서서히 심장박동 그래프로 바뀌어간다.


이 작품에서 파도는 여러 뜻을 가진 상징물로 등장한다. 서핑을 좋아하던 시몽 랭브르에게는, 파도가 스스로 살아있음을 인식하게 하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파도는 그에게 죽음을 불러오기도 했다. 새벽 서핑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가 일어났으니 말이다. 이후 마리안과 션, 줄리안은 순차적으로 불안과 슬픔, 분노 등 감정이 마치 파도처럼 요동침을 느낀다. 장기이식 수술이 시작되기 직전, 토마는 마리안과 션의 부탁에 따라 시몽의 귀에 파도 소리가 나오는 이어폰을 꽂아준다. 시몽이 그렇게도 좋아하던 파도 소리를 들으면서 인생을 마무리하길 바라는, 부모가 마지막까지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정리하며


여운이 긴 작품이다. 파도를 다루고 있지만, 깊은 바다를 닮았다.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이 공연이 돌아온다면 반드시 보러갈 것을 감히 권해본다. 극이 막을 내리기 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전 상태에서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에 몸을 맡기고,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 보라. 그리고 나의 심장이 뛰고 있음을, 나는 살아있음을, 온전히 느껴보길 바란다.



2022. 10. 20.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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