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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ongplate Apr 13. 2021

생의 주기가 나의 오분의 일인 생명체에 대한 고찰

털복숭이 너네는 생과 생 너머에서 제발 행복만 해


봄이 되면 생각나는 존재가 있냐면, 그렇다. 십년이 지나도 꼬박 생각나는 것을 보면 꽤나 각인이 된 존재일텐데 아무리 곱씹어도 가장 선명한 기억은, 내가 운 것이 대부분이다.


첫번째는 등교하려고 차비를 하는 중에 그 애가 내 이불에 오줌을 싸서 울었다. 고3이란 아침에 눈 뜨는 것부터가 서로운 법이다. 그런 나에게 오줌을 쌌어. 그때는 이불과 한몸이던 시절이니, 내 이불에 쌌으면 나한테 싼 거랑 마찬가지였다. 아침이면 사람이든 짐승이든 다들 으레 요의부터 해결하는 게 정도이거늘, 아무튼 그 당시의 나는 그게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엄마가 아는 지인에게서 데려온 새끼강아지였던 그 아이는 삼개월 짜리답게 똥오줌도 못 가렸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깨물고 다녔다. 감수성이 폭발하던 시기에 집안에 나말고 사고를 치고다니는 존재가 있다는 건 은근한 라이벌 의식까지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아마도 나는 그 아이를 미워했던 것 같다. 이름은 온이었다. '오는'의 준말이었다. 언니와 내 이름 가운데에 두면 뜻이 이어지도록 이름 붙였다.


두번째는 고3 첫 모의고사 날이었다. 삼월 모평의 의미가 어땠는지 지금은 가물가물하지만, 가능하면 조용하고 고요히 귀가하는 게 신상에 이로운 날이었다. 그리고 내 바람대로 나의 모평은 아주 조용히 묻혔다. 그 아이가 죽었다. 그래서 그것보다 중요한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우리는 그 아이를 중성화 수술에 보낸 참이었다. 그 아이의 할아버지, 그러니까 우리에게 온이를 입양보낸 아저씨가 가던 동물병원에 별 생각없이 맡겼고 온이는 다시 오지 않았다. 그 아이가 고작 삼개월을 살았던 때, 채 꽃이 피기도 전이었다. 조금만 더 크면 꽃놀이 가자고 그래도 내가 누나니까, 어깨를 으쓱하면서 했던 말을 지키기도 전에 아주 가버렸다.


세번째는 급식을 먹으러 급식실에 올라가는 중이었다. 계단 한가운데서, 급식에 대한 열의로 가득찬 군중 가운데서 울었다. 친구를 붙잡고 울었다. 온이가 죽었어. 생전 강아지 자랑 한번 않던 놈이 염치도 없이 광고라도 하듯 울었다.


네번째는 그렇게 한 해가 흘러, 벚꽃이 흩날리던 캠퍼스에서였다. 한번도 꽃놀이를 못한 존재에 대한 회한으로, 인간의 욕심으로, 뉘우치지 못한 잘못으로, 의미없는 반성으로 울었다.


꼬박 십년을 봄이면 온이가 생각났다. 봄에 오는 것들은 대부분 분홍분홍하고 따뜻한데, 온이는 검고 차갑게 왔다. 그 짧은 날들로 나는 다시는 내 인생에서 내 스스로 생명을 거두어 키우겠다는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그 십년 째 되던 봄에, 3월에 온이의 검은 털과 다르게 하얀 털을 뽕뽕하던 아이가 불쑥 왔다. 맨날 그 아이를 혼자두고 빈번하게 출장을 가버리는 주인 탓에, 약간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또 준비도 없이 어린 생명체가 나의 생활권에 들이닥쳤던 것이다.


나는 싫어. 분명히 얘기했었는데. 그 꼬물이가 이전 주인에게 불리던 이름에는 이제 더이상 반응하지 않고, 우리가 새로 붙인 이름에만 귀를 쫑긋하게 된 게 이제 삼년이다.


나는 하얀색 털뭉치를 보면서 맨날 죽음을 생각한다. 이 짧고 짧아 허탈하기까지한 견생에 매일 비통에 잠긴다. 목전에 둔 죽음에게 매일 아침 인사 건네고 쓰다듬고 뽀뽀하고 사랑한다 말해준다. 그러면 죽음은 가시지 않지만, 죽음은 온전히 우리 앞에 존재감을 빛내며 끼어들지만. 죽음 따위가 두려워서, 사랑스러운 존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음을 하나의 죽음과 하나의 생명으로부터 배운다. 아프지 말고 오래 살아. 건강해야 돼. 이제는 어느 인삿말보다 익숙한 대화를 통해서. 거북 구 자를 두개 연달아 붙여, 거북보다 오래 살라며, 구구라는 이름으로 아이를 부르며.


온이는 구구보다 형이다. 온이는 삼개월만 살다 갔는데도 내 마음에 자리를 빌려 산 때문에 열살도 더 먹은 노령견이 됐다. 구구는 꽃놀이를 한다. 봄에 와준 덕분에 네번의 꽃놀이를 했다. 구구는 이미 성견일 때, 중성화를 하고 왔었다. 그게 퍽 다행이었다.


견생이  짧다. 고작해야 인간의 오분의 일을 살다간다. 나는 신이 털뭉치들을 좋아한다고 확신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이로운 존재들을 쉽게 세상에서 떠나보낼리 없다. 잔인하고 고맙게도, 비루한 인간에게 이십 년의 생의 주기를 달콤한 맛보기로 선물한 것이다.


  너머에서 온이는 저를 먼저 부른 그와 함께 꽃놀이를 했을 테니, 그 믿음으로써 나는 죽음을 놓아간다. 온이는 분명 지는 꽃에 아쉬워 하고 있을 것이다.


다섯번째는 지금인 듯. 엄청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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