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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성 Mar 04. 2024

런던 여행기 (1)

도시에 살지만 도시가 그리웠던 나

유럽에서 6년 넘게 살면서 가보지 않은 나라가 손가락 안에 들어올 정도로 좁혀질 때까지, 나는 영국에 발을 디딘 적이 없었다. 스톡홀름에서 2시간 40분이면 런던 히드로 공항에 갈 수 있는데 도대체 왜 영국행을 그토록 미뤄왔을까? 딱히 기회가 없기도 했지만, 굳이 기회를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은 까닭에는 내 겁 많은 성격도 한몫했다. 국어를 제외하고 가장 잘하는 언어가 영어임에도 불구하고 영어권 나라에 가기에는 어딘가 겁이 난다는 생각. 그 생각이 아마 내가 영국은 물론이고 같은 유럽에 있는 아일랜드나, 다른 영어권 나라 여행을 주저하게 만들었던 이유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구글 번역기와 손짓 발짓을 해가면서 힘든 시간을 보내는 일이 다반사였던 나의 과거 행적과는 꽤 모순되는 생각이다. 하지만 적어 놓고 보면 모순적이기 짝이 없는 생각이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그런 일이 드물지만은 않을 것이다. 나에게는 그것 (중 하나)이 바로 영국을 비롯한 영어권 국가 여행을 꺼려왔던 것이다. 

물론 영국에 가면 맛있는 스콘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학술대회 등록 컨펌 이메일 답장을 1초 정도 앞당긴 것 같기도 하다

23년 9월 영국에 간 것도 순전히 일 때문이었다. British Society for Population Studies (BSPS)라는 학회의 콘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2박 3일의 학회 일정은 런던에서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런던에서 실제로 머문 시간은 만 하루 정도였다. 공항에서 Stoke-on-Trent로 이동하는 길은 쏜살같이 지나쳐만 갔고, 학회 일정을 마치고 출국까지 하루가 조금 안 되게 여유가 생겨서 둘러본 것이 이번 런던 여행의 전부였다. 


짧은 여정이었지만 런던에서 보낸 시간은 많은 영감과 생각할 거리를 주었고, 다양한 감정을 수반했다. 그중 가장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은 런던의 첫인상이었다. 오래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을 다시 본 것 같은 익숙함. 연고도 전혀 없는 낯선 도시에서 쉽게 느낄 감정은 결코 아니었다. 되짚어보면 내가 익숙함을 느낀 이유는 명확했다. 평생 도시에서 자랐고, 서울과 경기도를 벗어난 적이 없는 나에게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이곳저곳을 누비는 런던의 대중교통과 출퇴근 시간에 인파로 인해 발 디딜 곳조차 없이 휩쓸려야 했던 경험은 너무나도 익숙하게 다가왔다. 비좁은 튜브에 몸을 구겨 넣고, 서로 몸이 닿지 않기 최대한 노력하면서 한 정거장씩 나아갔던 그날의 저녁시간이 쾌적한 경험이라고 이야기하긴 어렵지만,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이라는 감정이 내가 도시 생활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사람들 속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와중에도 여러 번 되묻게 만들었다. 


스톡홀름에 살면서, 공기 좋고, 녹지도 많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이기에 있을 건 다 있는 이곳이 내가 살기에 적당한 규모의 도시라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이곳이 너무 뻔하고 심심한 곳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스톡홀름에 비하면 런던의 빽빽함이 주는 느낌은 서울의 그것과 훨씬 닮았다. 물론 그런 런던에서 3년, 10년, 혹은 평생 살라고 하면 그것마저 반길지는 모르겠지만, 런던에 다녀온 다음에 스톡홀름이 한동안 더욱 따분하고 지루하게 느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도시에서의 삶에 대한 그리움은 밀도의 문제임과 동시에 속도의 문제이기도 하다. 구체적으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사는 환경마다 서로 다른 '삶의 속도'가 있기 마련이다. 스톡홀름에서의 조금 느린 삶의 리듬을 처음에는 반겼지만, 나는 꾸준히 내 일과 삶의 속도 사이에 엄청난 괴리가 있음에 불편해했던 것 같다. 스웨덴 사회의 리듬은 다소 느긋하다. 난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해 본 적은 별로 없다. 아마 육체적, 정신적 건강 측면에서는 대체로 좋을 것이다. 반면 연구자로서의 삶은 훨씬 빠른 템포를 요구한다. 연구자의 경쟁은 국경을 초월한 전 지구적 경쟁이다. 출판 분야는 내가 아는 바가 워낙 적어서 잘 모르겠지만 저널과 학술대회 투고로 대표되는 연구자들의 '생산성 경쟁'의 속도는 꽤 빠르다. 그리고 특정 나라에 국한된 저널이나 학술 대회에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경쟁은 태생적으로 국제적인 경쟁이다. 결국 연구자로서 스웨덴 사회의 리듬보다 빠르고, 스웨덴 사회가 선호하는 것보다 훨씬 경쟁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는 현실 속에서, 차라리 내 주변을 감싸는 삶의 리듬도 내 일의 리듬처럼 좀 더 빠른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절대적 속도만큼이나 상대적인 속도 차이도 적응 난이도를 높이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스톡홀름에서 보낸 지난 3년과, 스웨덴에서 보낸 지난 5년 반을 한 발짝 떨어져서 객관화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나니 박사 과정을 마친 후의 삶을 고민하는 데에서 오는 심적 부담감도 조금 덜 수 있었다. 스톡홀름은 분명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이지만, 내가 이곳을 떠나 조금 더 북적이고 붐비는 곳으로 가거나, 멋 훗날 계획한 대로 한국에 돌아가서도 다시 잘 적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그리고 혹시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영국에서 박사 학위 이후의 커리어를 쌓는다면, 악명 높은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또 그럭저럭 3년 정도는 버티며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 그런 생각들을 하며 패딩턴 역 근처 숙소에서 출발해 저녁을 같이 먹기로 한 일행이 있는 UCL 쪽으로 향했다. 


왼쪽: 다음 이야기가 시작되는 UCL 캠퍼스 모습 오른쪽: 제레미 벤담 캐비넷. 공부를 많이 하면 나타나는 대표적인 부작용 중 하나로 이런 것을 굳이 앨범에 담는 증상이 있다. 


그날 저녁과 그다음 날 오전, 런던을 조금 더 돌아다니고,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나는 런던이 내가 경험했던 유럽 수도 중에서 관광객으로서 방문하기에는 가장 좋은 곳이라고 해도 손색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런 긍정적인 평가에는 런던의 다인종/다문화 사회로서의 모습이 한몫했다. 


이야기는 런던 여행기 (2)에서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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