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으로 도망치지 않았다면, 지금쯤…

상상은 말랑한 나의 도피처

by 오레오오

누구나 그런 순간이 있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날,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이 터질 것 같은 날.

딱 그날이었다.

원고는 안 써지고,

계약서 수정은 세 번째고,

메일은 네 통이나 씹혔고,

누군가는 “아이들 책, 그거 쉬운 거잖아요?”라고 말했다.

나는 조용히 노트북을 닫고

아무 말 없이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상상 속으로 도망쳤다.

그림책 속 캐릭터에게 도망쳤다.

오늘은 쥐돌이, 어제는 뽁뽁이,

가끔은 나만 아는 비밀 괴물에게도.

현실이 너무 뾰족할 땐

상상이 가장 말랑한 도피처가 된다.

그 도피처는 아무도 없고,

나만 있는 작은 동굴 같아서

울고 싶을 땐 울 수 있고,

화를 내고 싶을 땐

“쥐돌이가 아주 삐졌어!”라고 말해버리면 된다.




상상은 도망이라고 하기엔 너무 근사한 도착지다.

사람들은 현실을 견디라고 말하지만,

나는 상상으로 버텼다.

눈앞의 일들이 해결되지 않아도

상상 속에서는 마법이 통하고,

말도 안 되는 일이

그림책에서는 너무 잘만 돌아간다.

그런 걸 한참 그리고 있으면

현실에서 쥐어짜 내던 불안이

살짝씩 풀린다.

이게 회피냐고?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때로는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기 전에 도망칠 구멍 하나쯤은 있어야 살아진다.

돌이켜 보면,

상상으로 도망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지쳐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림책 작가는커녕

이런 글도 쓰고 있지 않았겠지.

상상이 나를 살렸다.

그림책 속 아이들이 웃는 걸 보며

내가 울고,

내가 상상해 낸 캐릭터가

나를 위로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노트북을 다시 열 수 있었다.

계약서를 고칠 힘도 생겼고,

메일도 다시 보낼 수 있었다.

우리는 늘

도망치지 말라고 배웠지만,

나는 말하고 싶다.


가끔은 도망치는 게 용기다. 상상은 도망을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그러니 오늘도 도망치자.

잠깐이면 괜찮다.

도망쳐서 상상하고,

상상해서 다시 살아보자.

그림책 속 토끼도 말했잖아.

“숨바꼭질은, 숨어야 재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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