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토끼의 대사가 아니라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토끼를 그리려 했다.
귀가 길고, 눈이 동그랗고,
당근을 좋아하는 그런 익숙한 토끼.
그런데 그림이 완성될수록 이상했다.
눈빛이 자꾸 나 같았다.
그 외로움, 그 겁 많음, 그 가끔 터지는 쓸데없는 오기.
내가 토끼를 그렸는데,
토끼가 나를 따라 그려지고 있었다.
그림책을 만들면서 자주 겪는 일이다.
처음엔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언제부터인지
그 속엔 내가 자꾸 튀어나온다.
토끼가 도망치는 장면을 쓰다가
그게 꼭 나 같아서,
“나 지금 뭐 쓰는 거지?” 하고
펜을 놓은 적도 있다.
그림책 속 주인공이
“나는 혼자가 아니야”라고 말하는 장면을 썼을 땐
괜히 눈물이 났다.
그건 토끼의 대사가 아니라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림책은 짧고 단순하지만
그 안에는 어른 하나가 꼭 숨어 있다.
바로, 그걸 만든 나.
작가라는 사람은
캐릭터 뒤에 숨어서
사실 자기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아이들은 놀랍게도 그걸 안다.
"이 토끼, 약간 무섭죠?" 하면
아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 토끼, 나 같아요.”
아니다.
사실은 그 말도 맞고,
그 토끼는 ‘우리’ 같다.
나는 이 직업이 좋다.
자꾸 나를 들켜버리는 직업.
나를 숨기려 해도
펜 끝에서 자꾸 튀어나오는 나.
그건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림책이라는 걸 믿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나를 솔직하게 담아도
누군가는 그걸 보고 웃거나, 울거나, 공감한다는 걸 아니까.
“어른이 만든 어린이 이야기”라는 말속엔
그 어른이 아이였던 시절이 숨어 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그 시절의 나를
토끼 뒤에 몰래 숨긴다.
귀를 길게 그리며, 마음을 더듬는다.
그래서 다음 이야기엔
토끼가 용감하게 걸어간다.
아마,
다음의 나도 그럴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