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종이 한 장이면 된다.
아니, 사실 벽지도 괜찮고, 바닥도 상관없다.
볼펜이든 크레파스든 심지어 토마토케첩으로도
그림 그리고, 이야기 만들고, 세계를 펼친다.
상상에 조건이 없는 거다.
상상이 먼저고, 도구는 나중이다.
그런데 나는?
이야기 하나 시작하려면
카페에 가야 하고,
창가 자리여야 하고,
사람이 너무 없어도 안 되고, 너무 많아도 안 되고,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에, 커피는 라테, 얼음은 한 개만…
그렇다.
나는 조건을 잔뜩 달고 상상에 진입한다.
그러니까 나, 어른이다.
“아이의 마음으로 상상해 보세요.”
라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그 마음으로 가려면
어른은 온갖 장비를 갖춰야 한다.
아이의 상상은 뛰고 구르고 엎어지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스파크라면,
어른의 상상은 GPS 찍고 안전벨트까지 맨 다음
출발 버튼을 누르는 일이다.
카페에 앉아
두 시간째 한 줄 쓰고 있다.
내 앞에 앉은 대학생은 친구랑 깔깔대고 웃고,
옆자리 엄마는 아이랑 영어단어 외우는 중.
그런 풍경 속에서,
나는 그림책 속 곰돌이의 성격을 고민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나는 지금 아이를 위한 이야기를 쓰는 중인데,
아이들은 전혀 없고
전부 어른들만 있는 이곳에서
나는 아이의 세상을 만들고 있다.
종이 한 장이면 충분했던 때가 있었을 텐데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카페와 와이파이, 조용한 음악과 디카페인에 기대야만
상상할 수 있게 된 걸까?
어쩌면 나는
이야기를 쓰는 게 아니라
그 시절로 돌아가는 입장권을 매번 끊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 입장권 가격은 아마 라테 한 잔.
(요즘엔 비싸다. 거의 상상세 수준이다.)
그래도 그 한 잔을 앞에 두고
내 안에서 살금살금
토끼가 달리고, 곰돌이가 노래하고, 아이가 뛰어오르면
나는 아주 조용히
혼자 웃는다.
상상은 여전히 살아 있고,
비록 카페가 필요하긴 하지만
그건 뭐… 어른이니까 이해해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