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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상호 Mar 10. 2018

1화. 우상호의 슬기로운 감방생활

국내 몇 안되는 ‘희귀 범죄자’가 되다


우상호라는 사람을 알고 계시는지.

워낙 대변인을 많이 해서, 그리고 지난 해 탄핵 정국 때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를 맡았기 때문에

얼굴이나 이름을 아는 분은 적지 않다.


하지만 정작 우상호가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며, 왜 정치를 하는 사람인지 아는 분은 그다지 많지 않다. 내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아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해도 많이 샀다. 항상 어느 계파에도 속하지 않고 파벌을 만들지 않으려는 나의 모습이 특정 계파에 ‘적대적’인 것처럼 비춰지기도 했고, 반대로, 정세균 대표 밑에서 대변인을 하면 ‘정세균 계’, 당의장이 정동영일 때 대변인을 하면 ‘정동영 계’로 불리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래서 이제 내 얘기를 들려드리려 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왜 정치에 뛰어들었는지, 나와 정치적인 뜻을 함께했던 이들은 누구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내가 특정 계파로 분류되는 활동을 하지 않는지 알려드리고자 한다. 


나의 이야기는 좀 엉뚱하지만 ‘슬기로운 감방생활’로부터 시작된다. 나의 감방생활은, 사실 슬기롭지는 못했다. 담배를 거기서 배웠기 때문이다. 내게 담배를 건네준 이는 ‘조폭 형님’이었다. 








‘조폭 형님’으로부터 담배를 배웠다고는

하지만 나는 폭력범으로 수감된 사람이 아니었다.

대학생이 폭력범으로 수감될 리가 있겠냐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학생운동을 하던 이들 중에는 시위 집회를 벌이며 ‘폭력을 휘둘렀다’는 죄목으로 수감된 사람이 적지않았다.  


하지만 나는 아주 ‘보기 드문 죄목’의

범죄자였다. 바로 ‘국가모독죄’였다.

그런 죄목을 갖게 된 경위도 미묘했다.

나는 87년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을 맡으며

6월 항쟁 기간을 전후해 학내외 갖은 시위와 집회를 지휘했다.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것도

내가 주도한 집회에서였다. 나는 한열에게 최루탄을 겨눈 이들을 처벌해 달라고 검찰에 고소했다.

그러나 검찰은 ‘가해자를 특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검찰은 이를 기각했다. 






‘한열이는 죽었는데, 누군가 최루탄을 쏘라 명령했고, 누군가 최루탄을 쏘았는데,

아무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니!’ 나는 분노했다.


검찰에 항의하기 위해 당시 덕수궁 옆에 있었던 서울지검으로 향했다. 

그런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예비검속에 걸렸다.

남대문 소속 경찰들이 내 가슴에 달린 검은 근조 리본을 보고 운동권 학생이구나, 짐작하고 연행한 것이다.  


“야 임마, 꿇어!” 


이른바 ‘닭장차’ 안에서부터 구타가 시작되었다. 남대문 서에 도착해서도 신나게 얻어맞았다.

내 옆에는 당시 총학생회 사회부장이었던 우현도 나란히 무릎을 꿇고 얻어맞고 있었다.

그런데...신원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해프닝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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