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이 나를 풀려나게 해주었소.”
87년 6월 9일 이한열이 연세대 교정에서 쓰러린 후 수많은 사람이 그의 소생을 기원하며,
혹은 그를 경찰의 침탈로부터 지키기 위해 세브란스 병원이나 연세대학교를 찾았다.
학생, 성직자, 재야인사, 정치인....
하지만 김대중 당시 통일민주당 고문은 올 수 없었다.
가택연금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으로 한열을 만나러 온 것은 7월8일.
한열이 한 달 가까이 중환자실에 누워있다 결국 절명한 뒤였다.
6.29 선언으로 비로소 가택연금에서 풀려난 김대중 고문이 빈소를 찾아왔다.
김 고문은 당시 한열의 상주를 맡은 내 손을 잡고 말했다.
“학생들이 나를 풀려나게 해주었소.”
김 고문은 울먹이고 있었다.
그로서는 죽은 한열이 그의 정치적 고향이자
80년 군부독재의 민간학살의 현장인 광주 출신이라 더욱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그는 다음날 한열의 장례식에도 참여해 지팡이를 짚고 걸어야 하는 불편한 몸으로
영결식이 열린 연세대학교부터 노제가 열리는 시청까지 시민들과 함께 행진했다.
그리고 그를 다시 만난 것은 1년이 지난 88년의 일이었다.
뜻밖의 제안이 왔다.
“정치 하지 않겠소?”
87년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평화민주당과 통일민주당으로 갈라졌다.
나에게 정치 입문을 제안한 것은 평화민주당 측이었다.
누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김대중 평민당 총재 측근 인사였다.
사실 이한열의 장례 이후 김 대통령을 만난 것은 단 한 번이었다.
두 번째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감했을 때 학생운동을 했던 동료들과
함께 동교동으로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였다.
한 시간 정도의 만남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는 별다른 기색이 없었는데, 후에 측근을 통해 출마를 권유하신 것이었다.
당시 평민당은 진보적 재야인사와 젊은 학생운동권 출신 등을 대거 영입하던 때였다.
만일 그때 그분의 제안을 받아들여 정계에 입문하고, 바로 국회의원에 출마해서 당선되었다면?
그때가 내 나이 만 25살이었으니, 아마 최연소 국회의원 기록을 세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정계 입문 제안을 고사했다.
그것은 나의 소신 때문이었다.
국민의 힘으로 애써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야권의 분열 때문에 정권교체에 실패한 87년 대선 이후,
나는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