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울시장 박원순 Nov 08. 2017

촛불 1년, 시민민주주의의 길을 말하다

혁신네트워크 제3차 포럼에서

   촛불 이후 1년이 되었다.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극심해지면서 축적된 분노가 임계점에 이른 시민들이 책임감을 느끼고 광장으로 뛰어 나온 것이 촛불이다. 그 과정에서 ‘시민’이 탄생했고, 시민민주주의를 잉태했다. ‘시민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시민이 시민주권을 행사하는 정치적 ‘주체’로 서고, 정치권력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기 위해 정치적 행동에 ‘참여’하고, 정치적 운명에 공동 ‘책임’을 지는 것, 즉 국가가 아닌 시민이 민주주의를 이끌고 가는 것이 ‘시민민주주의’다. ‘시민민주주의’는 새로운 개념이라기보다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복원하고 실현하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촛불 국면 속에 있고, 촛불은 현재진행형이다. 촛불이 제기한 개혁과제를 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광장에서 잉태한 ‘시민민주주의’를 잘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광장은 시민민주주의의 저수지다. 저수지의 물이 메마른 곳으로 흘러가도록 물꼬를 트고, 물길을 연결해야 한다. 첫 번째 길은 광장에서 국회로, 두 번째 길은 광장에서 일상의 공간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하지만 두 공간 사이의 여전한 거리감이 확인된다. 촛불 1주년을 맞아, 두 길을 연결하기 위한 시급한 과제와 그 실천적 방향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자 한다. 제 1 과제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복원, 제 2 과제로 직접민주주의의 보완, 마지막으로 시민력과 일상의 민주주의 활성화를 말하고자 한다.     



제 1 과제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복원하라


   대통령을 바꿨다. 이제 국회를 바꿀 때다. 우리 민주주의 역사를 볼 때 우리 국민들이 주기적으로 광장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대의제 설계가 잘못 되었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제도정치의 실패, 제도의 한계가 누적된 분노를 광장에서 일시에 쏟아내는 광장민주주의를 불러온 셈이다. 따라서 촛불정신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주권자의 뜻이 보다 충실하게 효율적으로 반영될 수 있도록 대의제 민주주의를 복원하고 강화해야 한다. 정당은 정당답게, 국회는 국회답게 조직되고 운영되어야 한다. 


   더불어민주당은 정당발전위원회를 발족하고, 혁신안을 발표했다. 직접민주주의를 내걸고 당원의 권리 및 풀뿌리 조직 강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것은 새로운 혁신안이라기보다 그동안 대의제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원칙에 소홀했다는 반성문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당은 기성 정치에 함몰되지 말고 끊임없이 혁신해야 한다. 정치에서 평범한 보통 시민, 소외된 시민을 정치적 주체로 세우고, 이들이 일상적으로 의견을 제시하고 토론하는 통로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나는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현재는 민주당 소속의 서울시장이다. 하고자 하는 일은 같지만, 힘의 방향이 다르다. 시민운동가 시절에는 시민사회에서 제도정치로 압박을 통한 변화를 추구했다면, 지금은 정당 안에서 대의제를 복원하고 강화하는 쪽으로 무게중심을 이동했다. 2000년 낙선낙천운동도 대의제의 정상화를 위한 것이었다. 요즘 나는 시민들을 만나면 정당에 가입할 것을 권유한다. 정당을 통한 변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다. 최근 소상공인들이 대규모로 더불어민주당 권리당원으로 입당했다. 흔히 자영업자로 불리는 소상공인들은 그동안 생업에 바빠서 정치에 관심이 없거나 또 관심이 있더라도 시간이 없어 정치에 참여하기 어려웠던 점을 감안하면 큰 변화다. 이번 기회에 평범한 보통 시민들의 세계와 현실에 더 깊이 뿌리를 둔 정당으로 거듭나길 기대한다. 
 

   촛불은 사회적 대연정 속에서 가능했다. 그땐 모든 정치인이 협치를 말했다. 촛불정신은 협치로 이어져야 마땅하다. 여기에서 협치는 정당간 협치는 물론이고 시민사회와의 협치를 포함한다. 협치는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이 민주주의고, 그 과정을 통해서 민주주의가 성숙할 수 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적폐 청산 역시 전 정권에 대한 심판이나 편 가르기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복원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보수와 진보, 여야를 따지지 않고 함께 해야 한다. 현재 다당제의 구조를 존중하고, 협치를 제도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난 대선에서 대통령뿐만 아니라 야당이 공통적으로 공약으로 내걸었던 개혁과제에서부터 시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것이 선거제도 개혁이다. 


   지금의 소선거구제는 전체 시민의 의사를 제대로 집약하지 못하고 있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등 다양한 의견을 대변하기가 어렵다. 정치다양성을 저해하고, 대규모 사표를 발생시켜 표심을 왜곡시키며, 미래세대인 청소년의 참정권을 제한한다. 대통령을 바꿨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이제는 국회를 바꿀 때다. 대통령뿐만 아니라 야당의 공통분모인 선거제도 개혁을 매개로 초당적인 개혁 협치의 틀을 만들 것을 촉구한다.       



대의제 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직접민주주의

 

  지난 8월 20일, 새 정부 출범 100일을 맞아 열린 대국민 보고대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민주주의를 거론하자 큰 파장이 일었다. 직접민주주의의 강화가 대의제 정치를 외면하고 여론에 휘둘리는 무책임의 정치, 반정치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직접민주주의의가 대두된 것은 직접민주주의가 대의제 민주주의를 우선하거나 우월해서가 아니다.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기 위한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직접민주주의는 위임받은 권력을 잘 활용하기 위해 대의제를 보완하고 숙의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어떤 민주주의냐가 중요하다. 어떤 사안에 대해 어떤 방법으로 직접민주주의를 도입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와 검토가 필요하다. 이 부분에서 직접민주주의의 중요한 매개로서 지방정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서울시는 지난 6년간 시민의 직접 참여의 공간을 열어왔다. 시민의 의견을 들어 정책을 만들고 시민과 함께 다듬는 ‘청책(聽策)’과 첨예한 갈등 사안에 대해서 찬반토론을 충분히 벌이고 결정하는 ‘숙의(熟議)’라는 제도를 취임 직후부터 사용해왔다. 이 과정에서 처음 구상했던 정책이 바뀌기도 했고, 내 생각이 바뀌기도 했다.


   이번에 새 정부 1호 숙의민주주의 사례로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의 결과가 나왔다. 이는 결과를 떠나 의미 있는 과정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이런 공론화 과정을 통해서 관료와 전문가가 밀실에서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 원탁에서 토론을 통해서 결과를 도출했다는 점은 분명한 성과다. 다만 직접적인 이해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지역주민과 미래세대의 목소리가 잘 담기지 못한 점 등 설계의 한계가 지적된다.공론화 전 과정을 면밀하게 복기하면서 나타난 한계점을 개선해나간다면 ‘숙의’는 갈등해소의 새 모델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시민이 정책을 제안하는 ‘시민발안제’, 시민이 특정예산의 사용처를 제안하는 ‘시민참여예산제’, 시민이 감사하는 ‘시민감사옴부즈만’ 등은 시민에게 직접적인 결정권과 함께 책임도 동시에 부여한다. 이는 지방정부가 다양한 시민민주주의의 공간을 열고, 시민정치를 활성화하는 매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 서울시는 시민민주주의의 다양한 통로와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온라인 플랫폼 ‘민주주의 서울’을 오픈했다. 시민들은 여기에서 직접 필요한 정책을 제안하고, 토론, 숙의, 정책결정 등 이행 과정까지 참여할 수 있다. 참여의 진입장벽을 낮추고 시간과 장소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 양적, 질적으로 우리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주 여수에서 열린 시도지사 간담회에서 자치분권 로드맵과 지방분권 개헌에 대한 의지를 천명했다. 지방정부는 지방분권과 주민자치를 통해 풀뿌리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다양한 민주주의 실험에 중요한 매개가 될 수 있다. 진정한 지방정부를 실현하기 위해서 실질적 지방분권을 위한 권한과 재정이 함께 이양되고, 지방정부와 지방의회와의 협치도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중앙정부와 중앙당간의 관계와 함께 지방정부, 시도당, 시민으로 이어지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병행적 구도를 확립하기 위해서 지방정부의 정당책임도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시민민주주의의 토대, 일상의 민주주의가 중요하다 


   촛불 이후, 여러 측면에서의 성찰이 있었다. 우리는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외치지만, 각자가 일상에서 민주주의자가 되지 못했다는 성찰은 매우 중요하다. 촛불의 진정한 성패는 시민의 일상에 달려있다. 좋은 정부, 좋은 정치인은 긴 안목으로 시민력을 배양하고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는 시민사회를 활성화하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정치인의 사명이고 책무라고 할 수 있다. 


   일상의 민주주의를 위해 가장 기본적 토양이 되는 것이 ‘시민력’이다. 나는 시민운동가 시절부터 지금까지 시민의 공공적 역량을 발견하고 배양하는 노력을 해왔다. 시민력은 정부와 개인 사이의 공간을 메울 자발적 결사체의 자양분이 되고, 그것이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지난주 50플러스 축제 행사에 갔더니 엄마협동조합, 아빠협동조합에서 나와 있었다. 50플러스 캠퍼스가 시민력을 배양하고, 동기부여하는 공간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작은 증거다. 서울시의 다양한 공간, 예를 들어 시민청, 청년허브, 서울혁신파크, 50플러스캠퍼스, 찾아가는 동주민센터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생업에 바쁘고, 자산과 권력이 적은 이들일수록 일상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통로가 별로 없다는 점은 여전히 뼈아픈 지점이다. 촛불광장에 나왔던 시민들의 다수가 중산층 이상이었다는 점은 이러한 사실을 방증한다. 지금 추진되고 있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제도와 사업이 자영업자와 주부에 의존하고 있다는 지적도 여기에서 나온다. 먹고살기 바쁘고, 저녁이 없고, 주말이 없다면 민주주의에 관심을 갖기 어렵다. 밥이 민주주의고, 휴식이 민주주의다. 먹고 사는 문제와 일상의 정치에 참여하는 인간다운 삶, 품격있는 삶을 위해서는 포괄적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위코노믹스(WEconomics)’도 그런 문제인식과 해법을 담고 있다. 기존의 성장중심경제와 달리 성장과 분배 문제를 균형 있게 다루자는 것이다. 당대의 성장을 위해서 미래세대의 권리와 인권, 다양성, 공동체, 환경을 희생시키면 안 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동반성장하고, 노동과 복지 등 분배영역을 같이 포용하여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할 때 실질적 민주주의도 가능하다.


   정치가 중요하다. 정치가 문제라고 정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정치답게 만들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이 바로 정치의 역할이다. 이제 정권교체를 넘어 정치교체로 가야 한다. 촛불 이후 1년, 우리는 그 갈림길에 놓여있다. 정치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권위주의 시대에는 대통령 한 명에 모든 힘이 집중되고, 대통령이 지시해서 변화를 만들어냈다면, 이제는 변화를 만들어내는 힘의 방향도 바뀌어야 한다. 그게 정치가 해야 할 일이고, 촛불민심에 응답하는 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절박함을 외면하지 않으려 합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