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장마와 여름도 이제 한풀 꺾인 것 같다. 밤새 에어컨을 틀어야 잠을 잘 수 있었지만 이제는 추석 때 무엇을 할지 고민을 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 여름 내 찬 면 요리를 찾다가 또 잦은 야근 때 먹던 배달음식이 질릴 때면 집밥이 생각난다. 강렬한 맛은 없지만 먹고 나면 종일 든든하고 속이 편한 음식이 여름 막바지면 꼭 생각난다. 빨리 한 끼 때워먹는 밥 말고 주말에 오후까지 침대에 누워있자면 오늘 하루 아무것도 하고 싶진 않지만 밥 한 끼라도 제대로 먹으면 알찬 하루를 보낸 것 같은 느낌이 들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럴 때 집밥 대용으로 유용한게 백반이다. 신기하게 백반집 사장님은 늘 나이 지긋하신 할머니이시고 좋아하는 고기반찬 한 가지와 계란말이, 각종 나물반찬, 따뜻한 국한 그릇을 뚝딱 내어주신다. 신사동에 개미식당을 좋아하는데 밥도 김도 반찬도 무한으로 주신다. 근데 반찬 하나하나 맛있고 심지어 제육은 내가 먹어본 제육 중에 역대급 맛이다. 만들어 주신 음식의 정성과 우리 아들 같은 손님들이 사회생활하면서 고생하는데 한 끼 제대로 먹이겠다는 마음으로 내어주신 그 마음에 항상 고개가 숙여지는 맛이다. 직장인 최대 고민인 점심메뉴를 고민하지 않고 들어갈 수 있도록 매일 메뉴가 바뀌는 백반은 흰쌀밥 원 없이 먹으면 부자라고 생각하시던 우리 할머니 세대의 자식사랑과 같은 음식이라는 생각을 한다.
고기도 신선하고 양념도 잘하시고 특히 불맛이 살아있다.
한국의 식문화를 공부하다 보면 재미있는 것이 있다. 한국인은 1970년대 통일벼가 나오기 전까지 보릿고개 걱정을 하면서 살아야 했다고 한다. 일 년에 절반을 굶고 사는 게 일상인 이 지지리도 운이 없는 민족은 추수하고 쌀이 있을 때라도 많이 먹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추석 때나 손주가 집에 올 때면 양껏 담은 흰쌀밥에 산에서 구하기 쉬운 나물 몇 종류를 버무려 주시고 따뜻한 국물을 내어주셔야 비로소 한 끼라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반찬이 아닌 흰밥을 준다는 것을 강조하는 백반집에서 공깃밥 천원은 반칙이다.
다블뤼선교사에 따르면, 많은 어머니들이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밥을 채워넣는 것을 본다. 때때로 숟가락 자루로 아이의 배를 두드려보다 꽉 찼을 때에 비로서 밥 먹이는 것을 중지한다.
집밥 같은 백반이 소중한 이유는 김치찌개 한 그릇도 배달되지만 반찬을 리필해가며 먹는 백반의 정은 배달하진 못하기 때문이다. 구수한 냉 보리차 한 컵 먹으면서 밥은 알아서 퍼 먹으라면서 마진은 생각 안 하시고 배불리 먹고 가라고 말씀해주시는 할머니의 정은 어플이 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은 보고 싶다. 똥강아지 배가 얼마나 찼나 보면서 고봉밥 퍼주시는 할머니가 차려주신 집밥을, 사실 고백하자면 출퇴근의 편리함으로 포기했던 가족의 정을 올 추석 혹 할머니가 차려주신 집밥을 먹는 부러운 누군가에게 필자를 대신하여 고봉밥 양껏 먹고 일 년 거뜬히 일할 힘을 받아오시길 기원합니다.
PS 백반은 비교적 싼 가격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이지만 손이 많이 간다. 그래서 인건비의 상승으로 백반집이 점점 줄어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지금보다 비싼 가격에도 기꺼이 백반을 먹을 용의가 있다. 아마 기성세대들이 은퇴한 이후에도 백반을 찾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지만 한편으로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램을 해본다.
고봉밥으로 먹지 말고 음식을 보관하여 조금씩 먹으면 보릿고개가 없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고온다습한 기후로 음식 보관이 어려웠다고 한다. 우리는 냉장고가 당연한 세대지만 냉장고는 1980년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홍보는 없고 요리를 통해 깨달았던 내용이나 스토리 있는 음식과 문화를 설명하는 밥 먹는 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