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들은 우스갯소리가 생각난다. 프랑스인은 부부싸움을 하면 애인에게 가고 미국인은 법원에 간다는 것이었다. 이런 농담은 미국인들이 사소한 일까지도 법적인 절차에 의존한다는 일종의 조롱이었지 결코 합법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주변에서도 많은 분쟁들이 소송으로 귀결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서민들에게는 거액의 소송비용으로 먼 얘기일 뿐이다. 억울한 일이 있어도 피해를 감내해야 하는 경우도 적잖을 것이다.
물론 당사자간의 분쟁이 해결점을 찾지 못할 경우 종국적으로 제삼자의 객관적이고 공정한 판단을 구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당사자간에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보다는 소송으로 가는 경우가 빈번해지는 것 같다. 이러한 경향은 정치권에서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민주주의의 기본인 대화와 타협은 실종되고 국가의 중대한 사안들이 헌법재판소와 법원의 법적 판단에 의해 결정되는 기형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마치 법률적 판단이 공정하고 합리적이라는 듯한 법률 만능주의가 법치주의의 탈을 쓰고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헌법에 명시된 국회의 입법 기능은 동등한 헌법적 지위를 가지는 대통령의 재의 요구권으로 법적 효력을 상실하고 국회의 행정부 견제 기능은 절차적 문제를 이유로 헌법재판소나 법원에 맡겨져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무너뜨리는 건 아닐까 한다. 형식적으로는 사법부의 판단이 공정한 면을 가지고 있다. 형사사건의 경우 피고와 원고의 대립적 구조에서 제삼자인 법률에 의한 법관의 판단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일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주가조작 사건에서 보듯이 검사의 불기소로 형식적인 요건조차 갖추지 못하는 경우 정치적 갈등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극한 대립만 불러온다.
법치주의가 무엇인지 나도 글자 그대로의 의미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민들에게는 법규를 준수하라고 할 때 법률의 사후적 역할이 아닌 사전적이고 예방적 기능을 강조한 것이라 생각한다. 법률은 분쟁을 해결하는 사후적이고 보충적 기능만을 갖는 성숙한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법률이 모든 분쟁을 명확하게 규율할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다면 법관의 법률적 판단은 무의미할 것이다. 이처럼 법률은 흠결을 가지고 있고 소수의 법관에 의한 법률의 적용과 해석상 오류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불완전한 판단에 국가의 중요 결정들을 맡긴다는 것은 위험하고 무책임한 일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