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예술이 차고 넘치는 시대에 일상을 어떻게 채워볼까? 다양성은 선택의 기쁨을 줄 수도 있지만 선택에 어려움을 느끼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괴로운 일이 될 수도 있다. 노란가방이 제안하는 아트 버킷리스트 중 관심 가는 아이템이 있다면 ‘나의 버킷리스트’에 추가하여 하나씩 즐기시기를!
“물랭 루즈?” / “툴루즈 로트렉!”
단어 맞추기 게임을 할 때 제시어가 ‘툴루즈 로트렉’이라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물랭 루즈는 로트렉의 작품 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다. 1889년 몽마르트르에 개장한 이곳은 당시 파리의 밤 문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댄스홀로, 물랭 루즈(Moulin Rouge, 빨간 풍차)라는 명칭은 옥상에 설치한 빨간색 네온사인 풍차 장식에서 기인한 것이다. 물랭 루즈는 이내 파리의 명소가 되었고, 유명 인사들이 드나드는 최고의 사교장이었다. 쾌락과 향락이 넘쳐나는 그곳은 평생 동안 어머니 외에 다른 여자와는 진정한 사랑을 나누지 못했던 로트렉에게 안식처이자 아틀리에였고, 그곳에서 펼쳐지는 공연, 가수와 댄서는 그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었다.
앙리 드 툴루즈-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 1864~1901)은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온 가족의 사랑과 관심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근친결혼을 해온 집안의 내력으로 후손이 번성하지 못했던 만큼 사람들은 그를 ‘작은 보석’이라 부르며 애지중지했으나, 로트렉의 부모 또한 이종사촌 지간이었으니! 불행하게도 성장하면서 그의 신체적 결함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선천적으로 뼈가 약했던 그는 13세에 의자에서 떨어지면서 부러진 뼈가 잘 붙지 않아 성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의 키는 137cm에 불과했고 가냘픈 몸집에 비해 머리는 크고 다리는 짧은 기형적인 외모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와 관련된 글을 보면 외모로 의기소침하지 않고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지만, 콤플렉스가 없었을까? 본래 성격은 소심한데 그 소심함을 감추기 위해 더 과장되게 쾌활한 척을 하는 사람처럼 로트렉 또한 마음속에 자신만의 상처를 감추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 그에게 드로잉은 큰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8세가 되던 해 프랑스 남부의 본가를 떠나 파리에 있는 학교에 입학했지만 건강이 나빠져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와 개인교습을 받았는데, 저택에서 가족, 하인, 가축 그리고 말 등을 그리며 혼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로트렉은 말 타는 것을 무척 좋아했지만 말을 탈 수 없었으니 얼마나 속상했을까!
1882년, 18세의 로트렉은 파리로 가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고 여러 화가들과 교류하며 지냈다. 그 즈음 유럽 각국의 화가들이 파리로 모여 들었고 특히 몽마르트르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중심지였다. 폴 세잔, 에두아르 마네, 베르트 모리조, 에드가 드가, 르누아르, 피사로, 클로드 모네 등은 전통적인 파리 살롱전의 화풍과는 다른 새로운 기법의 인상주의 작품을 선보였다. 로트렉은 몽마르트르에 작업실을 두고 화랑과 미술관을 돌아다니고, 작가들과 카페에 모여 토론하는 등 세기말 파리의 분위기를 온전히 즐겼다.
로트렉과 그의 작품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았던 벨 에포크(La belle époque)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는 것도 좋을 터.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80여 년간 혁명과 폭력 등 정치적인 격동기가 이어졌던 프랑스에 모처럼 평화와 풍요의 시기가 도래한다. 이른바 아름다운 시대 ‘벨 에포크’다.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이 세워진 것도 이때이며, 지하철이 개통되고 파리만국박람회가 열리는 등 파리에는 산업과 예술과 문화가 번성했다.
어느 한 시대를 골라서 살아볼 수 있다면 가서 살아보고 싶을 정도로 벨 에포크 시대는 화가뿐만 아니라 스콧 피츠제럴드, 헤밍웨이, 르 코르뷔지에, 코코 샤넬 등 작가, 건축가, 디자이너 등에 이르는 동시대인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당대의 인물들과 간접적으로나마 교류하고 싶다면 메리 매콜리프의 <예술가들의 파리> 3부작을 추천한다.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 <새로운 세기의 예술가들>, <파리는 언제나 축제> 등 총 3권으로 구성된 책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를 살았던 유명인들의 만남, 관계성, 연애, 불륜 등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롭게 담겨있다.
로트렉은 어린 시절 드로잉을 즐겨 그리면서 대상의 형태나 움직임을 자세히 관찰하고 그 특징을 명확하게 포착해 내는 능력을 키울 수 있었다. 그가 평생에 걸쳐 집중한 대상은 인물인데, 파리의 밤 문화를 화려하게 만드는 몽마르트르의 여인들을 즐겨 그렸다. .물랭 루즈에 지정석을 두고 매일 밤 드나들며 눈에 보이는 장면을 캔버스에 담았으며, 이 외에도 파리 유명 카바레의 가수, 배우, 댄서들이 작품의 대상이 되었다. 1892년에서 1895년까지 3년 동안은 몽마르트르의 유곽에서 일주일 내내 지내며 그곳에서 매춘부들이 쉬고 있거나, 카드놀이를 하거나, 손님을 기다리거나, 화장하는 모습을 몇 시간이고 지켜보았다. 로트렉의 석판화 연작 ‘엘르(Elles)’는 이렇게 완성된 것이다. 로트렉은 배우들과 댄서들의 지친 모습에서 연민을 느꼈고, 술집 손님들의 허식과 무지를 꿰뚫어 날카롭게 풍자했다.
상업미술과 순수미술의 벽을 허문 로트렉의 포스터는 최초의 현대적인 포스터로 평가받는다. 댄스홀, 카페, 극장 등이 번성했던 ‘벨 에포크’의 활기찬 매력을 단순하고 추상적인 디자인으로 표현한 그의 포스터는 좋은 반응을 얻었고, 벽에 붙은 포스터를 떼어 가려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로트렉은 파리의 유명한 카바레 스타인 제인 아브릴을 ‘디방 자포네(Divan Japonais)’ 포스터에서는 카페 콘서트를 관람하는 매력적인 여인으로, ‘에글란틴 무용단(LA Troupe de Mile Eglantine)’ 포스터에서는 다른 댄서들과 함께 자유롭게 캉캉 춤을 추는 모습으로도 그려냈다.
로트렉의 포스터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 중 하나는 샹송 가수 아리스티브 브뤼앙이다. ‘앰배서더 카바레의 아리스티드 브뤼앙(Aristide Bruant dans son cabaret)’이라는 포스터에서 그는 풍성한 망토를 걸치고, 챙 넓은 모자를 쓰고, 붉은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있는 브뤼앙의 모습을 보여준다. 동일한 색채가 화면을 넓게 차지한 로트렉의 감각적인 포스터 덕분에 브뤼앙은 일약 유명 인사가 되기도 했다.
툴루즈 로트렉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을 뿐 아니라 예술가와 비평가들의 인정도 받았다. 그러나 알코올 중독, 매독으로 건강이 심하게 악화되었고 1899년에는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정신착란 증상과 기행이 심해져 몇 달간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퇴원 후에도 작업을 하기는 했지만 몸의 마비 증상이 와서 결국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실려 가서 37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평생 동안 그를 아끼고 사랑했던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 알퐁스 백작은 로트렉이 불구가 된 이후에는 그다지 애정과 관심을 갖지 않았다. 미술을 배우고 화가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말하자면 카바레, 사창가 등에서 먹고 마시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필요한 경제적 지원은 해주었지만 가문의 명예를 중시하며 그에게 가명을 쓰도록 했다. 그래서 로트렉은 작품에 트레클로(treclau, 로트렉의 철자 순서를 바꾼 것)라고 서명하거나 아예 서명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언제 어디서나 추함은 또한 아름다운 면을 지니고 있다. 아무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곳에서 그것들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짜릿하다”라는 로트렉의 말이 오래도록 머리속을 맴돈다. ‘툴루즈 로트렉展’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5월 3일까지 열린다.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입장 마감은 오후 6시).
데일리타임즈W 정지현 기자 dtnews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