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에게 한 달간의 특별 휴가가 주어진다면?
대부분의 직장인은 누적된 업무 피로감을 어떻게 풀까?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커피 한잔하면서 수다를 떨 수도 있고, 운동을 하며 땀으로 진한 스트레스를 배출할 수도 있다. 그밖에 일과 일상의 온도차를 줄이기 위해 소소하게 퇴근 후 할 수 있는 것으로 무엇이 있을까? 혼술, 혼밥, 혼영…. 요새 혼자 하는 게 유행이라는데? 평소 혼자 얕고 넓게 배우기 좋아하는 이 과장이 퇴근 후 취미 탐색 프로젝트를 진행해보고자 한다. 그런데 그 첫 시작이 산티아고 순례길이 될 줄이야! 평범한 직장인의 특별한 휴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순례길 첫날 단단히 무장하고 길을 나섰다. 순례길에서는 발이 생명이기 때문에 발 보호를 위한 특단의 조치는 다 취했다. 신발과 마찰이 잦은 부위에 물집 방지 패치를 미리 붙이고, 발가락 사이사이 바셀린을 듬뿍 발랐다. 생전 처음으로 멋은 포기한 발가락 양말도 신고, 그 위에 울 양말까지 덧대 완벽한 발 보호 시스템을 가동했다. 노력이 가상해서인지 물집은커녕 발이 오히려 뽀얗게 고와져 한국으로 돌아왔다.
걷고 또 걷고, 순례길 서막
프랑스 생장에서 스페인 론세스바예스(25km)로 가는 첫날의 여정은 순례자들이 힘들다고 손에 꼽는 구간 중 하나다. 피레네산맥을 지나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국경을 넘게 되는데 가파른 길이 많아 체력이 많이 필요하다. 속된 말로 첫날의 일정치곤 많이 ‘빡센’ 편이다. 체력이 걱정되는 사람은 중간 지점 ‘오리손 산장’(8.5km)에서 하루를 묵을 수 있는데, 예약이 빨리 차니 최소 한 달 전 예약하는 것이 좋다. 하룻밤이 부담스럽다면 산장에서 운영하는 바에서 잠시 쉬었다 갈 수도 있다. 여기서는 직접 짠 생 오렌지 주스나 생맥주를 마셔줘야 한다. 가격이 비싸지만 해발 800m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덤이기 때문에 한 번쯤 들러 보길 추천한다.
그렇게 또 하염없이 걷다 보면 스낵카가 우리를 반긴다. 스페인으로 넘어가기 전 프랑스에서 마지막 스탬프를 찍을 수 있는 곳인데 스낵카 영업은 주인아저씨 마음이기 때문에 날씨가 궂으면 못 만날 수도 있다. 운이 좋게 스낵카를 만난 우리는 열로 가득 찬 발도 식힐 겸 커피 한 잔과 삶은 계란 한 개를 사서 잔디밭에 털썩 앉았다. 물집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자주 발을 식혀주고, 땀을 말려줘야 한다. 촘촘히 동여맨 등산화 끈을 풀고 신발을 벗으니 세상 자유를 다 얻은 것만 같다. 발가락을 있는 힘껏 벌려 바람이 송송 통하게 했다. 삶은 계란을 반으로 쪼개 엄마랑 나눠 먹었다. 계란 따위가 이렇게 꿀맛일 줄이야! 언덕 위에 방목된 말 한 마리는 간식을 얻어먹기 위해 순례자 옆을 서성였다. 운 좋게 바나나를 얻어먹은 말이 핑크빛 잇몸을 드러내며 ‘히이잉’ 하고 울어댔다. 피로에 지쳐있던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루 앞도 알 수 없는 우리 인생
첫 장거리 행군으로 종아리와 골반이 아파졌다. 등산 스틱을 제2의 발삼아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했다. 대부분의 순례자는 수도원을 개조한 공립 숙소에서 묵게 되는데 규모가 크고 깨끗한 편이다. 숙소에 도착하니 몸이 풀렸다. 머릿속엔 얼른 땀에 찌든 몸을 씻고, 쉬고 싶은 생각만 가득했다. 하지만 먼저 침대를 배정받아야 한다. 한국에서 미리 예약을 해놓은 터라 빨리 쉴 수 있겠다 싶었지만 답답할 정도로 일 처리가 느렸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나이가 지긋한 봉사자다.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도 아니지만, 장년 봉사자 한 명이 자리 배정, 순례자 여권에 스탬프 찍기, 그리고 숙박비 계산까지 모든 일을 혼자 감당하고 있었다. 속도가 느린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런데 뭔가 부산스럽기까지 하다. 알고 보니 문제가 발생했다고 했다. 남성 순례자가 침대에 누워 쉬다가 심장마비가 와서 구조 헬기로 환자를 이송하느라 자리배정이 늦었던 것이다.
론세스바예스 숙소는 신청자에 한해 배정된 식당에서 다 같이 저녁 식사를 하는데 식사 시간에 들은 이야기로는 남자는 발견 당시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순례길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순례자들이 종종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첫날 이런 일을 직접 목격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다음날 아침 인포메이션 위에는 죽은 순례자의 영면을 기리는 사진과 초 하나가 쓸쓸히 타고 있었다. 그도 어떤 뜻을 가지고 순례길에 올랐을 텐데 아침에 길을 떠나면서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날을 꿈꾸며 설렘도 느끼지 않았을까 싶어 마음이 안타까웠다. 한편으론 죽음 앞에 삶이 참 가볍고 부질없어 보이기까지 했다.
순례길에서는 수많은 십자가를 볼 수 있다. 종교적인 이유로 십자가가 세워지기도 하지만, 길 위에서 죽음 맞이한 순례자를 위한 애도와 함께 그리움의 십자가나 돌탑이 세워진다. 새삼 ‘이 길이 쉬운 길이 아닐 수도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산티아고까지 얼마 남지 않은 날이었다. 그날도 신나게 길을 걷고 있었다. 길 한구석에 사진과 글귀가 적힌 종이가 바람에 날리지 않게 돌 아래 놓여있었다. 그런데 낯익은 사진이 보인다. 론세스바예스 숙소에서 죽음을 맞이한 남자였다. 누군가가 그가 걸어야 했던 길을 대신, 아니 함께 걷고 있었다. 문득 영화 ‘the way’가 생각났다. 피레네산맥에서 목숨을 잃은 아들의 유해를 품고 길을 걷는 아버지의 이야기. 못다 이룬 생전 마지막 도전을 그렇게 이루고 있었다. 그도 산티아고에 잘 도착했겠지?
숙소를 찾기 위한 전쟁
순례자만이 묵을 수 있는 숙소를 ‘알베르게’라고 한다. 일반 숙소보다 저렴하게 운영되기 때문에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순례자에게는 꿀 같은 혜택이다. 운영방식에 따라 공립과 사립으로 나뉘고, 기부제로 운영되는 곳도 있다. ‘알베르게’는 메일, 전화로 예약을 받고 당일 걸어서 오는 순례자들을 위해 침대 일부는 예약을 받지 않고 남겨둔다. 깨끗하거나 시설이 좋아 평이 좋은 숙소는 순례자에게 단연 인기가 높아 예약을 서두르거나 걷는 길을 재촉해야 한다. 아침부터 열심히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마음을 놓을 수 없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숙소를 잡기 위해 돌아다니다 보면 이미 예약이 꽉 찼다며 거절을 당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특히 순례자들이 많이 찾는 봄, 가을은 그야말로 숙소 전쟁이 시작된다. 걷기에 좋은 날씨 덕분인지 단체 순례자들이 길 위를 점령하기 때문이다. 이들과 일정이 맞물려 버리면 숙소 잡기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최악의 경우에는 숙소가 있는 다음 도시까지 무거운 다리를 끌며 더 걷거나 마을 체육관이나 길 위에서 노숙해야 할 수도 있다. 걸음이 남들보다 느렸던 우리 모녀는 노숙만은 피하자며 대부분의 숙소를 예약했다. 덕분에 편한 마음을 얻고 일정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번거로움을 얻었다. 혼자라면 숙소 선택이 더 자유로웠겠지만 엄마를 조금이라도 편한 곳에 모셔야 한다는 생각이 부담이 됐다. 특히 선택 장애가 있는 내게 숙소 선택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행 중 만난 어떤 분은 숙소 예약을 위해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던 내가 안타까웠던지 조언을 건넸다. 흐름에 맡겨라. 그게 여행의 묘미인데 너무 틀에 일정을 가두지 말길 바랐다. 쉬고 싶으면 쉬고, 더 걷고 싶으면 걷고. 그렇게 좀 더 자유로워지기 위해 떠나온 길이 아니었냐며 여유를 가지라고 했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숙소 전쟁에 휩쓸려, 여유를 잃고 스스로 족쇄를 채우고 있었다.
데일리타임즈W 에디터 이예림 dtnews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