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직장인은 누적된 업무 피로감을 어떻게 풀까?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커피 한잔하면서 수다를 떨 수도 있고, 운동을 하며 땀으로 진한 스트레스를 배출할 수도 있다. 그밖에 일과 일상의 온도차를 줄이기 위해 소소하게 퇴근 후 할 수 있는 것으로 무엇이 있을까? 혼술, 혼밥, 혼영…. 요새 혼자 하는 게 유행이라는데? 평소 혼자 얕고 넓게 배우기 좋아하는 이 과장이 퇴근 후 취미 탐색 프로젝트를 진행해보고자 한다. 그런데 그 첫 시작이 산티아고 순례길이 될 줄이야! 평범한 직장인의 특별한 휴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순례길에서 찾은 소소한 일상의 특별함
가을 순례길은 소소한 재미가 가득하다. 유년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던 엄마는 먹을 수 있는 열매와 버섯을 잘 구분했다. 길가에 가득 열린 복분자류의 열매를 보곤 신이 나서는 비타민을 섭취해야겠다며 복분자를 한주먹 땄다. 엄마가 건넨 복분자를 한사코 거절하다가 딱 한 개만 먹어보겠다고 입에 넣었더니 세상 달콤하다. 그 뒤부터는 복분자만 보이면 ‘엄마 저기 복분자다’라고 친히 알려드렸다. 숲길에서는 바닥에 돌 만큼 흔하게 굴러다니던 알밤들을 주워서 오독오독 씹으며 걷기도 했다. 발끝에 차이는 게 사과고, 밤이고, 도토리였다. 남들은 하나 둘 순례길 위에 무거움을 버린다는데 우리의 가방은 밤, 호두로 가득 채워졌다. 길에 집중하자며 매번 굳게 다짐했지만 밟히는 알밤들이 발을 붙잡았다. 그렇게 우리는 다른 순례자들에게 매번 추월 당하기 일쑤였다.
여정 중 피곤함을 풀기 위해 교외의 작은 호텔에서 이틀을 묵었다. 스페인 시골 구옥을 리모델링해 이국적으로 꾸민 공간이다. 호텔치곤 방이 4개밖에 없는 작은 규모지만, 호젓한 시간을 보내기에는 충분했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넘치도록 받아 호사를 누리고, 늦잠을 늘어지게 잤다. 침대에 뒹굴뒹굴하고 있자니 오히려 몸이 더 아픈 느낌이었다. 한껏 무료했던 우리는 동네 백수처럼 동네를 기웃거렸다. 주변엔 나무와 들판뿐이었다. 가끔 도로 위를 지나가는 차량만 보였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 엄마가 들판을 뚫어지게 보더니 무언가를 따서 건넨다. 네 잎 클로버였다. 그때부터 네 잎 클로버 찾기 경쟁이 시작됐다. 내 눈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엄마는 족집게같이 쏙쏙 찾았다. 이게 뭐라고 네 잎 클로버 찾기 게임은 2시간 뒤에야 끝이 났다. 엄마는 제각기 다른 네 잎 클로버의 무늬에 감탄하며 기뻐했다. 이 한낮에 그것도 스페인에서 60대 엄마와 30대 딸이 네 잎 클로버를 찾고 있다니…. 엄마는 이 시간이 참 감사하다고 했다. 언제 엄마와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순례길 위에서는 소소한 일이 특별한 추억으로 남는다.
사연이 가득했던 철의 십자가
여행 준비를 하면서 우연히 본 ‘철의 십자가’에 꽂혀 꼭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자기에게 소중한 의미가 담긴 물건이나 돌멩이를 놓고 기도를 하고 간다는 곳이다. ‘철의 십자가’는 스페인 폰세바돈과 폰페라다 구간 사이에 있다. 일정상 이 구간은 건너뛰는 게 몸이 편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그동안 가슴에 꾹 눌려 있던 것들을 내려놓고 싶었다. 전날 밤 숙소에서 돌멩이 대신 준비해 간 사진 뒷면에 글을 쓰곤 아침을 기다렸다. 저녁을 먹으며 마셨던 와인 한 잔에 감정이 올랐던지 일기를 쓰며 펑펑 운 덕분에 다음 날 두 눈은 붕어가 되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아침! ‘철의 십자가’를 향해 길을 재촉했다. 아직 새까만 바깥 하늘을 보고 늦장을 부렸더니 금세 해가 붉게 올라오고 있었다. 황홀할 정도로 멋진 풍경에 가슴이 두근댔다. 숨이 가쁘게 걸으니 더욱 마음이 벅차올라 눈물이 흘렀다. 속으로 계속 기도를 하며 언덕을 올랐다.
저 멀리 십자가가 보인다. 십자가는 생각보다 작았다. 이미 십자가를 지나 떠난 사람도 많았다. 떨리는 손으로 가슴에 품고 온 사진을 십자가에 걸고 기도를 했다. 결국 왔구나. 먹먹함을 달래고자 십자가를 얼마나 쓰다듬었는지 아쉬움에 쉬이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한참을 울고 보니 주변이 보인다. 수많은 돌, 사진 그리고 편지. 그곳에는 행복, 그리움, 슬픔이 쌓여 있었다. 십자가 밑에 저마다의 사연이 가득했다. 그 사연들이 모여서 언덕이 되었다. 마음의 무게가 덜어졌길 바라며 그렇게 또 길을 재촉했다.
모두 다 가질 수 없다
9월 말의 스페인은 걷기에 충분히 만족스러운 날씨를 선사했지만, 한낮의 태양은 20대 청춘같이 기세등등했다. 그 더위에 지친다고 함부로 옷을 걷을 순 없었다. 자칫 화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워도 긴 팔로 살을 가리고, 얼굴엔 선크림을 덕지덕지 발랐다. 20대에게 주근깨는 귀여움이지만 30대에겐 피로함이다. 선크림을 바르지 않았던 손등은 조금씩 벌겋게 익어갔다. 촌스럽게 익은 손등이 꼭 '시골 촌년' 같았다. 엄마는 바짓단을 무릎 아래까지 걷었다가 벗겨지지 않는 고운 커피색 판탈롱 스타킹을 얻었다. 우린 손등과 다리에 남은 영광의 흔적을 보면서 깔깔 웃었다.
한낮의 더위를 피하기 위해 해가 머리를 내밀기 전 이른 아침에 길을 서두르곤 했다. 땀에 젖은 옷이라도 빨아 널어 말리려면 일찍 숙소에 도착해야 했기 때문이다. 축축한 기운을 가득 머금은 새벽 공기 때문인지 몸은 한껏 웅크려졌지만 몇 분만 걷다 보면 금세 후끈해졌다. 앞이 보이지도 않는 깜깜한 길을 헤드랜턴 하나에 의지해 기계처럼 걸었다. 어둠 뒤로 풍경이 모두 숨어버려서 주위에는 온통 어둠뿐이었다. 잡념이 사라졌다. 코로 공기를 흠뻑 들이마시면 기분이 좋았다.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탁탁, 서걱서걱’ 등산 스틱이 길 위에 부딪히는 소리, 옷이 스치는 소리. 그리고 숨소리. 작은 소리 하나하나가 크게 느껴진다. 동이 튼 후 어둠이 걷히면 아름다운 풍경이 모습을 비춘다. '지나온 길에도 이런 풍경이 있었겠지?’ 생각이 든다. 혹시나 놓쳤을 아름다운 풍경이 아쉽기도 하다. 새벽길은 조용함과 차분함을 준다. 모든 일엔 장점과 단점이 있다. 그래 모두 다 가질 순 없다.
때로는 하늘을 바라볼 여유도 필요하다
순례길 마지막 날 오페트로우조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20Km를 걷는다.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열리는 순례자들을 위한 12시 정오 미사에 참여하고 싶어서 6시부터 걷기 시작했다. 부슬부슬 내리는 이슬비를 맞으며 길을 나섰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니…. 시원함 반, 아쉬움 반 마음이 상반되는 감정으로 뒤섞였다. 솔직히 더 걷고 싶었다. 걸을 때 잊고 있던 생각들이 다시 원상복구될까 봐 두렵기도 했다. 길을 나서곤 처음 만난 외국 순례자에게 ‘오늘이 마지막 날이네! 기분이 어때?’라고 인사를 건넸다. 돌아온 대답은 ‘yeah happy but sad’. 다 똑같구나, 길이 끝나서 홀가분하지만 아쉽고 섭섭한 기분도 감출 수가 없구나. 비슷한 감정에 동질감을 느끼며 ‘좋은 여행길 되세요’라는 의미의 ‘부엔 까미노(Buen Camono)’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마지막 길을 축복했다. 자욱했던 밤안개가 랜턴 불빛도 흩트려 버렸다. 희뿌연 랜턴 불빛에 의지해 곳곳에 숨겨진 노란색 화살표를 찾아 길을 걸었다.
미사에 늦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앞만 보고 열심히 걷다가 우연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우와’ 탄성이 절로 나왔다. 가던 길을 멈추고, 엄마와 뒤따라오던 중국인 순례자에게 하늘을 보라고 했다. 다들 고개를 들어 하늘을 한참을 바라봤다. 다들 별에 심취해 있을 때 저 멀리서 누군가가 큰소리로 우리를 불렀다.“거기는 잘못된 길이야. 이쪽으로 가야해!”아뿔싸! 노란색 화살표를 찾아 갈림길에서 선택한 길이 잘못된 길이였던 것이다. 별을 보기 위해 길을 멈추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들이 우리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길을 갔다가 잘못된 길은 다시 되돌아오면 될 일이지만 어두운 숲길은 위험하기도 하고, 되돌아오는 길에 에너지가 배로 들기 때문에 천만다행이었다. 삶이 그렇지 않을까? 대부분 우리는 조급한 마음을 품고 목표를 향해 앞만 보고 간다. 이 길이 옳은 길인지, 그른 길인지 판단도 못 한 채 말이다. 여유가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때로는 하늘을 바라볼 여유도 필요하다.
여행을 글로 남기면서 다시 길 위의 시간이 하나씩 되새겨진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나는 무엇을 바라고, 또 찾았을까. 삶의 단순함과 용기를 마음에 들였고, 엄마와의 추억 한 조각을 담아왔다. 사는 동안 위로가 필요할 때면 하나씩 꺼내보다 희미해질 때쯤 다시 길을 나서야지.‘부엔 까미노’ 인사하며.
데일리타임즈W 이예림 에디터 dtnews1@naver.com